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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8일 17시 10분 KST

스스로 'B급'이 된 대기업 직원의 사연

한겨레

[저녁 있는 삶] ④ 야근 강요하는 사회

해마다 취업 준비생 수십만명이 줄을 서는 대기업 빌딩들은 날마다 불야성이다. 텔레비전 광고에는 불 꺼지지 않는 사무실에서 강장제를 마셔가며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이 ‘건강하게’ 그려진다. ‘초장기 심야노동’에 시달리는 30대 대기업 사원들(입사 8년차 1명, 4년차 2명)의 인터뷰 내용을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대기업 경영기획실에서 6년째 일하는 서영표(34·가명)씨는 회사가 오직 ‘오너’에 충성하는 ‘눈칫밥 조직’이라는 것을 입사 3년 만에 깨우쳤다. 입사 초기 에이(A)급 인재로 인정받아 대리급 이상만 간다는 핵심 부서에 발령받았지만 출근은 ‘칼’ 같이 해도 퇴근시간은 기약하기 어려운 ‘살인적 노동’에 시달리다 스스로 비(B)급 사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개인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회사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이직 계획까지 세웠다.

# 플랜-디(D)

팀장: “영표씨, 이번 신제품 판매 전략건 말이야, 플랜-디까지 만들어 놓지?”

영표: “팀장님, 플랜-에이가 유력하다고 들었는데 이 밤중에 플랜-비도 아니고 플랜-디까지는….”

팀장: “윗분들 몰라? 만약을 대비해야지, 만약을. 부장님 결재 중에 먼저 퇴근할 것도 아니잖아. 시간도 남는데.”

자정을 넘기면서 ‘퇴근’을 기다리다 또 날벼락이다. 내 근무시간을 계산해 본다. 새벽 출근시각은 명확한데 퇴근시각은 들쭉날쭉이라 계산이 쉽지 않다. 1주일에 한 번은 새벽 2시를 넘기고, 주말에도 출근한다. 확실한 건 1주일에 40시간 노동을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내게는 무용하다는 사실이다. 소처럼 일해도 그게 나와 회사를 키우는 믿음이 있을 때는 견딜 만했다. 생산직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이 문제라는 기사를 볼 때도 내 얘기는 아니라고 자위했다. 하지만 내 노동시간이 회사 ‘오너’나 ‘윗분’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쓰이고 있다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되자, 내가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게 됐다.

‘오너’에게는 ‘비정규직’에 불과한 임원들은 하루 24시간 내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임원들 눈에 들려는 부장·과장·팀장도 마찬가지다. 노동시간의 많은 부분이 ‘문서 이동’에 소비된다. 각 팀장들이 올린 플랜-에이를 과장이 취합해 부장에게 보고하면, 부장은 임원들에게 전달하고, 임원들이 이를 승인하고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밤이고 새벽이고 서로가 서로를 기다려야 한다. 팀장·과장·부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플랜-비·시·디를 만들라는 무가치한 지시로 무료한 시간을 때운다. 새벽까지 ‘이 짓’을 하고 있으면 욕설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오른다. 에이급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임원들은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뚫고 들어온 최고 인재들이 디급 기획안을 만드는 사이 디급 사원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피해자다. 이사는 오너의 눈치를, 부장은 이사의 눈치를, 팀장은 부장의 눈치를, 사원은 팀장의 눈치를 보는 이 거대한 ‘눈칫밥 피라미드’에서는 오너의 작은 손짓만으로 무수한 ‘야근 피해자’가 양산된다. 나 역시 ‘매장 안에 얼음으로 된 구조물이 있으면 좋겠다’는 팀장의 농담 한마디에 야근을 자처해 ‘혹서기 매장 관리 대책’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정식으로 보고하면 ‘미친놈’ 소리 듣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난 번 말씀하신 것”을 위해 보고서를 쓴다. 팀장은 내가 뛰어난 보고서를 쓸 때보다 자신의 지질한 농담 한 마디를 기억할 때 기분이 더 좋아보인다.

# 몰락

팀장: “영표씨, 고생이 많아. ‘불금’인데 술 한잔 하지.”

영표: “말씀은 감사한데 월요일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 해서요.”

팀장: “쉬엄쉬엄해. 월요일 자료는 주말에 만들면 되지. 내일 점심 먹고 천천히 나와서 마무리해. 나도 나올 거니까.”

퇴근은 둘째 치고 꼭 법으로 정했으면 하는 게 하나 있다. ‘기러기 아빠’들은 보직을 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을 필리핀에 유학 보낸 팀장은 집에 갈 이유가 없다. 집엔 아무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미없는 농담에 웃어주고, 저녁도 함께 먹어주고, 주말에 등산도 가주는 사원들이 회사에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에 임원 보고가 몰려 금요일은 업무가 많다. 그런데도 팀장은 ‘불금’을 외치며 회식을 강행한다. 토요일에 개인적으로 할 일이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40~50대 간부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회사를 집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꽤 된다. “난 열심히 일하고 새벽에 들어가는 게 제일 좋아”라는 부장의 말은 “가족들은 내가 일찍 들어가는 걸 별로 반기지 않아”라는 말로 들린다.

젊은 시절 간부들한테서 시간을 ‘도둑질’ 당하느라 가족에게서 소외된 이들은 보복이라도 하듯 사원들의 시간을 빼앗는다. 일을 하는 건지, 팀장의 벗이 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밤낮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회사에 있다 보면 가족들과의 편한 시간은 1년 내내 손에 꼽을 정도가 된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나는 일을 했다. 결혼식이 코앞이지만 청첩장을 3장밖에 못 돌렸다. ‘나쁜 남자’보다 더 나쁜 게 ‘바쁜 남자’라는데, 요즘은 ‘혼인신고는 천천히 하자’는 여자 친구가 나중에 이혼 가능성까지 생각하는 건 아닌지 두렵다.

친구들과의 편한 술자리도 명절처럼 띄엄띄엄 찾아온다. 같은 대학을 나와 비슷한 규모의 회사에 취직한 친구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밤 9시에는 끝날 테니 ‘치맥’이나 먹자고 약속하면 밤 10시가 되어서야 한명씩 모여든다. 술은 좋아하는데 퇴근이 늦은 여자 팀원은 늦은 새벽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우리들 모두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 순간 이런 ‘몰락’을 상상이나 했을까.

# 덫

과장: “백 팀장, 요즘 일이 없나봐?”

팀장: “무슨 말씀이신지….”

과장: “오늘 부서장 회의에서 우리 부서 사무실 불이 가장 먼저 꺼진다던데? 어쩔 거야?”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한 부서장은 징계 대상이라도 된 것처럼 팀장을 쪼아댄다. 인사부서는 출퇴근 시간 입력 시스템을 이용해 사원들의 평균 퇴근시간과 평균 야근시간을 분석한다. 사원들이 경쟁 기업을 압도할 수 있는 창의적 기획안을 작성하는 대신 야근시간에만 신경 쓰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건만, 팀장도 부장도 오너도 우리 회사의 실적이 항상 목표치에 미달하는 진짜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밤 9시가 넘어서도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 상태인 수백명의 직원들이 있지만 이들 가운데 누구도 초과근로수당을 신청하지 않는다. 어느 부서의 누가 철없이 초과근로수당을 신청했다며 “그만한 연봉 받으면 됐지 수당을 또 신청하다니 염치가 없다”고 욕하는 팀장 옆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지식’이다. 회사는 1년치 봉급을 주고 1년치 노동을 산다. 1일이나 1주일 단위의 법정 노동시간은 ‘연봉’이라는 말 앞에 무력하다. 입사 초기 말만으로도 부자가 된 것 같았던 ‘연봉 ○천만원’은 결국 덫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난 에이급 인재였다. 입사 2년 만에 핵심 부서로 발령도 났다. 출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다며 동기들의 부러움도 샀다. 하지만 업무를 일찍 처리하고 퇴근하는 나에게 “일이 없냐”고 묻는 팀장의 짜증난 얼굴이 반복되면서 지독한 정체가 시작됐다. 일을 최대한 오래, 비효율적으로 하는 비급 사원이 되기로 결정한 것은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쳇바퀴 같은 날들을 살다 보면 고3 수험생 시절이 생각난다. 군 생활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때는 반복되는 생활을 끝낼 수 있는 ‘디-데이’가 있었다. 월급으로 먹고사는 내게는 더 이상 이런 생활을 끝장낼 수 있는 디-데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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