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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25일 06시 34분 KST

통통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녀들의 이야기

66100

[매거진 esc] 플러스사이즈 패션지 <66100> 파티 현장

66. 백화점 여성복 사이즈의 마지노선. 몸매가 숫자를 넘어갈 때 에스컬레이터는 ‘마담’ 브랜드 층으로 안내한다. 사이즈에 투항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예뻐질 것인가.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도 충분히 아름다워진 그녀들의 이야기.

지난 13일 토요일 저녁 서울 홍대 앞. 대여섯 걸음 걷고 한 번 멈춰야 할 만큼 길에는 사람이 많았다. 늘씬한 허벅지가 돋보이는 핫팬츠를 입고 남자친구 손을 잡고 가는 여성, 상의를 미니스커트 안에 싹 넣고 입은 무리의 소녀들 옆을 지나치자니 큼직한 상의에 검정 레깅스, 전형적인 ‘애엄마 룩’을 한 내 덩치가 더욱 돋보이는 듯했다. 움츠려도 좁아지지 않는 어깨를 움츠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위축감’에 대해 말하자면, 패션 담당 기자가 된 지난 4월 이후 쭉 내 뒤를 따라다니는 감정이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지 1년여 만에 몸무게는 12㎏이 불었다. 출산 전 55와 66을 왔다 갔다 하던 옷 사이즈는 77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여전히 내 사이즈를 인정하지 않고 예전에 입던 옷에 몸을 욱여넣으며 살고 있었다. 바지는 허리가 고무줄인 것만, 상의는 넉넉한 것만 살아남았다. 자신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옷차림으로, 취재 현장마다 굴욕이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플러스사이즈 패션매거진 <66100>의 창간 파티가 열린다는 서교예술실험센터 앞에 도착해서도 미리 화장실에 들러 영 아닌 것 같은 내 옷차림을 이리 보고 저리 봤다. ‘몸매가 이 모양인데 별수 있냐’는 체념을 담아 한숨을 한번 훅, 쉬고는 음악 소리가 들리는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이는 딱 붙는 검정 티셔츠를 꽃무늬 치마 안에 싹 넣고 입은 여성이었다. 하늘하늘 긴치마는 옆으로 길게 트여 있어 늘씬한 다리가 언뜻언뜻 보였다. ‘저 사람이 여기서 제일 섹시하군’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더 화려한 꽃무늬 프린트가 들어간 미니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보인다. 흐음, 여기 물 좋은데?

13일 밤 서울 마포구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플러스사이즈 패션 매거진 <66100> 창간 파티 현장. 다양한 사이즈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는 자리였다. 허리 위로 손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위쪽 사진의 주인공이 장서연씨, 긴치마의 트임 사이로 다리를 드러낸 맨 오른쪽 여성이 박유진씨.

새로운 세계였다. 냉정을 찾고 그 사람을 살피면 내 몸매와 비슷한 ‘플러스사이즈’였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표준’이라 주장하는 여자 66, 남자 100 사이즈 이상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예쁘다? 어떻게 예쁠 수가 있지?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 위의 마른 몸매 연예인들을 뜯어보는 기분으로 파티에 참석한 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왜 꼭꼭 가리고 살았나 싶어요.” 이렇게 말한 박유진(21)씨가 바로 꽃무늬 긴치마의 주인공이다. “사실 전 여태 민소매를 한 번도 못 입어봤어요. ‘쟤 덩치 크다’고 쳐다볼 사람들 생각에 엄두가 안 났거든요.”

키가 176㎝다. ‘77’은 좀 작고 ‘88’은 좀 크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박씨를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이름의 감옥이다. “어려서부터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발육이 좋다 보니 생일이 8월인데도 남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죠. 친구들은 ‘덩치 크다, 괴물 같다’고 놀렸고요. 고등학교 때는 교복 입고 지나가는데 짓궂은 남학생들이 몰래 뒤로 와서 키를 재보고 가기도 했죠.”

예쁘게 옷을 입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키에 맞춰 사면 허리·골반이 어색하고 품이 맞으면 어깨나 팔길이가 이상했지만 그냥 입었다. 자세는 늘 구부정했다. 굽 있는 신발은 절대 신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프라인 옷 쇼핑은 포기했어요. 엄마랑 백화점이라도 가면 늘 싸우고 돌아왔어요. 딸에게 맞는 옷이 없어 답답해진 엄마가 ‘니가 살을 빼야 살 옷이 있지’라고 화를 내고….”

그랬던 박씨가 달라졌다. 우연히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누군가가 누른 ‘좋아요’를 따라 <66100>을 만났다. “창간호 표지를 보고 충격받았죠. 저랑 비슷한 몸매인데 수영복 입고 당당한 포즈라니…. 더 놀라운 건 그 사진을 보고 정말 예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는 거예요.” 잡지에서 독자 화장품 모델을 모집하기에 지원했다. 두 달 전 화장을 받으러 간 날, 박씨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저를 처음 만나고도 키나 몸집 이야기 안 한 사람들은 처음이었어요. 다들 ‘플러스사이즈’였는데 하나같이 당당하고 예쁘더라고요. 특별한 ‘아우라’가 있다는 느낌. 그곳에서 처음으로 스모키 화장이란 것을 해보고 다짐했죠. 나도 예뻐지자!”

남들 시선을 더 끌게 될까봐 엄두도 못 내던 빨간 립스틱도 바르고, 덩치 큰 사람한테는 안 어울린다 생각하던 화려한 프린트의 옷들도 구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더 구석구석 살폈다. 뜯어보니 사랑스런 몸이었다. “큰 키 덕분에 시원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옷이 많더라고요. 이 긴치마처럼요.” 이날 입은 꽃무늬 긴치마에 발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샌들을 신는 것은 박씨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바지보다 긴치마가 스타일을 연출하기 더 쉽다. 치마 위에 티셔츠를 입을 때는 이제 자신있게 안으로 넣어 입는다. 머리는 단정한 흑발을 하고 화장은 화려하지 않게, 하지만 입술에 포인트를 준다. “무엇보다 자신감 있는 표정과 태도가 사람을 예뻐 보이게 하더라고요.” 어깨를 펴고 배에 힘을 준다.

8월, 박씨의 쇼핑 바구니에는 속이 비치는 옷, 등이 파인 원피스 등이 담겼다. 9월, 삼수 끝에 대학에 가고도 ‘폭탄담당’이 될까봐 멀리하던 소개팅·미팅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몽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좋아하는 작곡과 학생인 그는 이제 슬며시 ‘모델’ 활동은 어떨까 생각해본다고 한다.

굵은 벨트로 허리를 강조한 원피스가 인상적이었던 장서연(20)씨는 파티장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파티 공식 행사였던 ‘상대방의 친필 사인 모으기’에 참여하려고 그는 낯선 ‘파티 피플’ 사이를 누비며 17명에게 사인을 받았다. 그런 그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섭식장애 때문에 사람들을 피했다”고 털어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 스트레스와 이성 문제가 뒤엉켜 먹는 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자제력을 잃고 먹곤 했죠. 배가 찢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급격히 살이 쪘고 가족들은 대체 왜 살을 못 빼느냐고 구박하고…. 점점 무기력해지면서 아예 사람 만나는 게 싫어졌어요.”

한국여성민우회가 펴낸 <뚱뚱해서 죄송합니까?>를 봐도 살찐 여성들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가족이 많다. 장씨 역시 가족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가장 아프게 꼽았다.

울면서 굶고 울면서 운동하며 ‘이것은 삶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의 섭식장애 관련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미국 다큐멘터리 <헝그리 포 체인지>에 나온 “먹고 싶지만 먹으면 안 돼가 아니라 먹어도 되지만 난 안 먹을래”라고 생각하라는 말에 눈물을 흘렀다. “내게도 선택권이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플러스사이즈 모델인 김지양씨가 “당신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강연하는 영상을 본 뒤로는 생활이 달라졌다. 생각을 바꾸니 운동이 즐거워졌다. 몸무게 측정은 그만뒀다. 대신 거울 앞에서 옷을 입으며 “역시 난 허리 라인이 예뻐서 거길 강조하는 디자인의 옷을 입으니 예쁘구나”라는 식으로 자신을 예뻐해주기 시작했다. 즐겁게 운동을 하다 보니 요새는 똑같은 바지를 입어도 ‘핏’이 달라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 뿌듯한 마음과 함께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실감하곤 한다. 옷을 고를 때는 흰 피부, 굴곡이 살아 있는 허리선을 강조하는 의상을 주로 선택한다. 몸에 붙는 짙은색 하의를 입고 밝은색의 상의를 입은 위 허리 라인을 구분해 자기 몸매의 장점을 살린다.

장씨는 현재 자신의 외모에 “10점 만점에 8점”을 줬다. 중문학을 전공하던 그는 이제 심리학 복수전공도 시작했다. “저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샅샅이 뜯어보면 자기 안에 예쁜 구석이 하나라도 있으니 그걸 찾아서 예뻐해주라고.”

파티가 끝난 뒤 계단을 올라와 다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샅샅이 뜯어봤다. 어느새 피식,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