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2014년 04월 21일 13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4월 21일 13시 15분 KST

허리케인 카터, 미국 인종차별 상징 복서 별세

AFP
허리케인 카터, 미국 인종차별의 아이콘이었던 전직 복서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 인종차별의 상징인 권투선수 루빈 ‘허리케인’ 카터가 20일(현지 시각) 숨졌다. 향년 76세.

카터의 오랜 친구인 존 아티스는 이날 캐나다 토론토에서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던 루빈 카터가 잠자던 중 숨졌다고 밝혔다.

인기 권투 선수였던 카터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살인범으로 몰려 무려 19년 동안 옥살이를 한 뒤 무죄로 풀려나 인종차별의 아이콘이 됐다.

그의 이야기는 댄젤 워싱턴이 열연한 영화 ‘허리케인 카터’로 제작됐고, 밥 딜런의 노래 ‘허리케인’에 영감을 줬다.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덴젤 워싱턴(오른쪽)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카터는 교도소에서 나온 뒤 캐나다 토론토로 거주지를 옮겨 수감 중인 죄수들과 자신처럼 억울하게 기소된 이들을 일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카터가 여러 차례 면회를 가 친구가 된 톰 키드린은 “카터는 자신의 억울한 옥살이를 속상해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감정을 넘어선 인물이었다”며 “그것이 바로 카터의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루빈 허리케인 카터가 고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카터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연은 이렇다.

1966년 6월 미국 뉴저지의 한 선술집에서 백인 남성 3명이 두 명의 흑인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그와 친구 아티스를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했고, 백인으로만 이뤄진 배심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카터는 아티스와 함께 종신형에 처해졌다. 절도범 2명의 위증이 부당한 판결에 힘을 보탰다. 이들은 뒤에 자신들의 증언을 번복했다.

카터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다, 1976년 다시 재판을 받았지만 역시 유죄 판결을 받고 다시 수감됐다.

카터는 2011년 미국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세 번에 걸쳐 종신형을 선고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잘못된 정보로 판단한 12명의 배심원이 내가 죄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이 나를 범죄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죄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죄진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 전까지 카터는 앞날이 창창한 선수였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 강한 주먹을 휘두른다고 해서 ‘허리케인’이란 닉네임을 얻었다. 그는 사건이 있기 직전까지 27승(19 KO승) 1무 12패의 전적으로 프로복싱 미들급 세계 1위로 정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카터의 무죄는 진실을 밝히려는 주위의 노력에 힘입어 이뤄졌다.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등 많은 유명인이 카터를 변호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카터는 1985년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카터는 숨지기 며칠 전인 지난주 수요일(현지 시간) 오랜 친구 키드린과 얘기를 나눴다.

“친구, 보게, 죽음이 다가 오고 있어. 나는 준비가 되어 있네. 죽음이 나를 데려가지는 못할 걸세. 왜냐하면 내가 죽음을 맞아들일 테니까.”


4월 21일 오늘의 인기기사

‘유족충'이라며 실종자 가족 모욕하는 '일베'

장애인의 날, 경찰은 최루액을 쐈다

권지연, 권혁규. 이 남매를 잊지 마세요

단원고 교실 교무실 살아오라는 기원쪽지 빼곡

서남수 장관의 ‘황제라면'

PRESENTED BY 네스프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