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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31일 17시 35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01일 07시 44분 KST

추모 장국영의 삶과 시간 :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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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기일을 기리는 홍콩의 팬들 (사진 AFP)

4월 1일, 누군가에게는 만우절이고 누군가에게는 배우 장국영의 기일이다. 벌써 11년이 지났다. 오히려 사람들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장국영을 추억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장국영을 회고하는 또 다른 책이 나왔다. 제목은 ‘다른 빛깔의 불빛 : 장국영의 삶과 시간’(Firelight of a Different Colour: The Life and Times of Leslie Cheung Kwok-wing). 홍콩세계문학축제의 모더레이터이자, 게이와 레즈비언의 삶에 대해 글을 써온 나이젤 콜렛(Nigel Collett)의 작품이다. 이 책에는 장국영이 스타 반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의 연인관계, 유명세로 인한 위기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허핑턴포스트US는 나이젤 콜렛을 인터뷰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본 장국영은 어떤 배우였을지, 자살을 선택하기까지 그가 사로잡힌 불안은 무엇이었을지 더듬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인터뷰 | 커간 에드워즈 스타우트(Kergan Edwards-Stout) 소설가, 허핑턴포스트US 블로거

미국인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도 장국영을 처음 본 건 ‘패왕별희’와 ‘해피투게더’였다. 당신도 비슷했을 것 같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의 첫 모습은 어떤 거였나.

나 또한 1997년에 본 ‘패왕별희’가 처음이었다. 그가 죽었던 2003년 4월에 나는 홍콩에 있었다. 운전하면서 만다린 호텔을 지나치는 데, 그가 떨어졌던 도로 주변으로 꽃다발이 쌓여 있는 광경을 봤다. 이후 그에 대해 더 깊이 알아 갈수록, 그가 살아온 삶이 고전적인 비극 같았다. 장국영은 야단스러운 연예계에서 자신을 잃지 않은 용감한 게이 남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스스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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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명세를 타기 전 전부터 장국영은 이미 홍콩과 아시아에서 초특급 스타였다. 약 30년 동안 장국영이 아시아의 예술, 음악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장국영은 교육이나 훈련 없이 온전히 자신의 재능과 자신감으로 성공했다. 그가 대중의 스타로 떠오르면서 홍콩 연예계는 독립적인 문화 집결체로 성장했다. 그만큼 장국영은 많은 부분에서 홍콩이란 도시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은 상당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나 음악은 중국 본토, 일본, 한국, 싱가포르, 태국, 그리고 전 세계 곳곳 화교가 거주하는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다. 장국영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홍콩 스타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배우나 가수처럼 장국영도 데뷔 즉시 유명세를 얻은 건 아니었다. 장국영도 많은 좌절을 겪었다. 재능과 자신감뿐만 아니라 장국영의 성격도 그의 성공에 기인한 바가 있을 것이다.

장국영은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초창기 시절에는 그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연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장국영은 다른 배우에게 뭔가 배우게 됐을 때는 언제나 그에게 공을 돌렸다. 물론 누군가를 모방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또 다른 수준으로,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장국영의 경력은 끊임없는 변화로 채워진 것이다.

장국영은 동료인 진백강과 친하게 지내다가, 결국엔 절교하게 됐다. 그들이 어떻게 친해졌다가, 또 무슨 이유로 절교하게 된 건가?

게이 스타의 첫 세대인 나문(Roman Tam)이 장국영과 진백강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 둘 다 게이고, 솔로였는데, 서로가 자신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그저 친구가 필요했던 거다. 그 둘은 밤늦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둘을 갈라놓은 것은 연예계였다. 가수로서 진백강은 먼저 빛을 발했고, 영화계에선 주연급으로 올라섰다. 그때 만해도 장국영은 조연을 연기해야 했다. 장국영은 그러한 상황을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관계를 먼저 끊은 건 진백강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는 장국영이 훨씬 더 훌륭한 배우였다. 그런 질투가 증오로 이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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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은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으로, 그 이후에는 ‘패왕별희’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장국영이 과연 그렇게 엄청난 유명세를 잘 견딜 수 있었을까?

장국영은 자신의 유명세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것과 성공은 그가 원한 바였지만, 끊임없는 언론의 괴롭힘까지 원한 건 아니었으니까. 자유롭지 못한 생활도 마찬가지다. 장국영은 사람들과 정직하게 살아가면서,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장국영은 자신에 대한 언론의 거짓말과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결국, 캐나다로 도피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장국영은 스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우울증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인 대부분에게 장국영의 음악은 낯설다. 하지만 당신은 그의 음악적 성공에 대해 광범위하게 서술했다.

장국영은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노래를 잘하지 못했다. 대중은 그의 목소리를 '닭' 같다고 조롱했다. 무대에서 사람들의 야유를 받은 장국영이 퇴장한 일도 있었다. 장국영은 수 년 동안 훈련을 통해 목소리를 다듬었고, 결국 그의 목소리는 동시대 가수 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감미롭다고 평가받았다. 때로 장국영은 무대에서 누구보다도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장국영의 초창기 노래를 들어보면 알 거다. 1960년대 록에 기반한 듯한 그의 음악은 객석에 앉은 모든 사람을 통로로 튀어나와 춤추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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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를 할 때 장국영은 가장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편이었다. (사진 AFP)

장국영은 한때 여성과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의 삶을 철저히 게이로 바라보며 묘사했다. 나중에 장국영은 커밍아웃을 했는데 그가 있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장국영이 공개적인 게이 스타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나.

장국영 자신이 가진 굳은 신념이다. 2013년에도 장국영처럼 행동할 수 있는 스타는 없었다. 물론 자신이 이룩한 스타의 지위가 커밍아웃에 도움을 주었다. 장국영도 자신의 커리어가 정점에 오르기 전까지는 신중해야 했다. 캐나다에서 홍콩으로 돌아왔을 때, 장국은 이미 누구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때도 장국영은 주저하는 면이 있었다. 지금의 젊은 게이 스타들은 장국영의 소심함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런 공격은 정말 부당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그 대상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홍콩에 던졌다. 그 당시에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장국영은 '해피 투게더'에 출연했다. 이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어떤 질문이 쏟아질지, 예상하지 않았을까?

나도 그가 매우 의도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장국영은 자신에 대한 장막을 걷어버리려 했다. 홍콩은 점점 변화하고 있었고, 개방의 문을 열고 있었다. 장국영은 이제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야말로 어떤 시도를 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해피투게더'로 장국영의 팬들은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공개됐을 때, 장국영은 많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해피투게더'를 통해 배우로서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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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연인으로 발전한 당학덕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꼈다. 당학덕은 장국영의 마지막 연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당학덕은 장국영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장국영의 변덕스러운 재능이 꽃피려면 안정적인 버팀목이 있어야 했다. 당학덕은 모든 것을 받아 주었다. 장국영을 실망하게 하는 일이 없었고,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장국영이 언제든 돌아오고자 할 때 그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재무 전문가인 당학덕은 몇몇 순간에 장국영의 근심을 덜어주기도 했다. 물론 당학덕 자체가 매우 우아하고 매력적인 남자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울증과 싸우던 장국영은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장국영의 죽음은 정말 정신적인 문제와 커리어의 추락과 같은 문제에 따른 것이었을까?

우울증이 원인 중 하나인 건 맞을 거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월드 투어 콘서트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장국영과 같은 사람에게 그런 고민들은 굴욕감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그렇게 허물어진 짐을 끌고 가는 것 보다는 사랑했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신적 질병은 지금도 홍콩과 중국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질병을 치료하려는 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덮어버린다는 얘기다. 그래서 장국영의 삶은 더더욱 그를 사랑한 팬들에게 중요한 서사를 갖는다.

장국영은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난 이후에나 팬들을 운집시켰다. 장국영이 그의 팬들에게 남긴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장국영의 팬들은 그의 음악과 주연과 조연을 망라한 그의 영화를 사랑했다. 그의 사망 이후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팬은 장국영이 영화속에서 그려낸 따뜻함, 소박함, 겸손함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장국영은 상대방이 잘났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사람 자체로 소중히 대했다. 그는 친절하고, 진실했으며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수많은 팬에게 감동을 주었다. 팬들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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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들고 장국영 티셔츠를 입은 홍콩의 팬이 장국영을 기리고 있다. (사진 AFP)

'추'(追) - 장국영

분향미래일자(奔向未來日子) - 장국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