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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26일 08시 32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6월 01일 14시 29분 KST

'노아'의 대런 아르노프스키 : 성경의 진실에 대한 토론이 이 영화의 근거다 (인터뷰)

인터뷰/ 폴 브랜다이스 라우쉔부쉬(Paul Brandeis Raushenbush) '허핑턴포스트US 종교 편집장'

13살의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성경 속 노아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시를 썼다. 이 시는 당시 UN이 주최한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이후 그에게 노아는 평생의 숙원 같은 인물이 돼버렸다. 그렇게 32년이 지났다. 대런 아르노프스키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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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는 개봉과 함께 논란의 중심에 섰다. 놀라울 것도 없다. 성경 속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독교 신도들은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나섰다. 사실 이런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성경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성경의 복잡함을 감지하지 못하면, 그게 오히려 성경에 해를 가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노아’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영화다. 하느님과 창조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이 세계에서 인간이 맡은 역할에 대한 고민이다. 게다가 서사적이고 신화적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성경은 어떤 이야기인가. 역시 신과 인간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가.

‘노아’가 성경을 그린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점이 곧 누군가에게는 골칫덩어리가 될 것이다. '노아'가 성경 속 이야기를 그려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비전의 성경을 그렸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사이에는 인간의 역할과 관련된 격렬한 논쟁거리가 하나 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수호자이자 보호자인가. 아니면 다른 생명체를 장악해 인간의 목적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진 것인가. 이 논란은 ‘노아’와 관련해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영화가 그 문제에 대해 명확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가 불을 지핀 또 다른 신학적 질문은 노아에게 투영된 하느님이 자비롭고, 애정 어린지,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며 학살을 초래해 정의를 되찾고 싶어하는 존재 인지다.

독실한 크리스천에게는 하느님의 소명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안겨줄 것이다. 그분의 소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말도 안 되고 끔찍한 소명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동시에 하느님이 말씀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인류는 어떤 수호자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노아’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세기에 대한 ‘미드라쉬(유대인의 경전 주석서)’일지 모른다. 미드라쉬는 유대인에게 가장 소중한 전통이자, 성경에 담긴 윤리와 가치를 탐구하는 스토리텔링의 방식이다. (대런 아르노프스키도 유대인이다.) 나는 ‘노아’의 공동각본가이자, 프로듀서인 아리 핸델, 그리고 대런 아르노프스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한 걸까?

darren aronofsky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과 러셀 크로우

‘노아’를 만들면서 실제로 원본을 연구했나?

아리 핸델 | 우리는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읽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말하려고 노력했다. 미드라쉬의 전통에 근거해서 보자면, 원본엔 의도적인 빈틈이 있다. 특정 단어에도 여러 개의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상세히 연구하려고 할수록 그 속에서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가장 거대한 질문은 ‘왜 노아만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을까?’였다. 인간의 사악함이 벌을 받는 건데, 왜 똑같은 인간인 노아가 가진 사악함은 벌을 받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질문을 붙잡고 고민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답을 찾으려 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신화적인 감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노아’에서, 종말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건가? 영화를 만들면서 종말론, 혹은 세기말과 관련된 문학을 많이 접했었나?

대런 아르노프스키 | 그런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다. 이야기의 종말론적 성격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미드라쉬적인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종말은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어떤 장르로 비칠지에 대해서는 많이 고민했다. 종말 이후를 다룬 영화는 매우 많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그런 영화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

- 하지만 어쨌든 ‘노아’는 종말론을 다루는 영화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 그렇기는 하다.

아리 핸델 | 최초의 종말론 이야기인 건 맞다.

-당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영향을 준 게 있을까?

대런 아르노프스키 | 이건 우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구약 성서를 읽으며 토론을 해왔다. 성경 속 가장 거대한 이야기를 통해 삶의 가장 작은 문제와 큰 문제를 이해하려고 했이다.

그만큼 유대인에게 토론과 논평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해 온 일이다. 포스트 모던 문학이 등장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텍스트만을 떼어 놓고 모든 다양한 방식에 대입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방식이다. 우리도 텍스트를 존중하고, 상세히 읽어보면서 이해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카인 이후의 10세대, 세스 이후의 10세대를 아우르는 계보를 파악했다. 이 계보를 노아와 연결된 수많은 이름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그동안 노아를 단지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후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다시 텍스트가 담고 있는 내용을 존중하기로 하면서 노아를 ‘세스’의 후손으로 설정했다. 이 방식으로 고민하면서 우리는 카인의 후손들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노아가 세스의 계보에 있는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darren aronofsky

만약 이 영화로 설교를 한다면, 설교의 제목은 무엇이 될까?

아리 핸델 | 그냥 ‘노아’가 좋겠다.

제발, 최소한 부제라도 붙여달라.

대런 아르노프스키 | 노아 :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로 붙일 것 같다.

아리 핸델 | 나는 이 영화가 올바름 보다는 인간의 사악함에 관한 이야기 같은데…

그렇다면 ‘노아: 인간의 사악함’?

아리 핸델 | 그런데 그 제목은 이 영화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 다른 절반은 선의다.

아리 핸델 | 정확히 말하면 자비와 정의겠지.

대런 아르노프스키 | 그렇다면 ‘노아 : 자비와 정의’?

아리 핸델 | 이 영화는 정의에서 자비로 이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악함과 선의 사이의 균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선의와 사악함을 함께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영화 속에서 노아는 하느님이 명령한 끔찍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만드는 데에만 10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당신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대런 아르노프스키 | 그건 모두 영화 속에 있다. 일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노아와 그의 창조주의 관계. 그들이 서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가 영화의 감정적 핵심이다. 나는 텍스트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력했고, 그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을 뿐이다.

아리 핸델 | 중요한 질문이다. 이 영화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영화 속 두발-카인이 하느님에게 묻는다. 왜 자신과는 대화하지 않냐고. 사실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런 아르노프스키 |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이 영화를 봤으면 한다. 이 영화는 일단 오락영화다. 모든 사람이 긴장과 기대치를 던져 버리고 와서 영화를 즐겼으면 한다. 조금 더 바라자면, 영화를 본 후 논쟁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