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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2일 13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3월 13일 05시 57분 KST

한국에서 ‘미의 기준' 이란

MBC
문화방송

뉴욕타임즈 저널리스트 조디 칸토르는 지난달 '뉴욕 타임즈'에 '한국인의 외모 집착’이란 주제로 글을 썼다. 칸토르는 한국인이 침실에 들기 전 이불 위에 분홍색 보를 가지런히 덮어 놓는 등,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칭찬하며 “한국에 가서 여행도 하고 쇼핑도 즐기고 돌아왔다."라고 했지만, "한국 여성들이 사야 한다고 권했던 머스트-바이 아이템들은 구매하지 않았다.” 라고 기사 마지막에 덧붙였다.

나는 부모님의 고향 서울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뉴욕주 버펄로라는 곳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국인들이 강조하는 미적 기준과 서양의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목적은 같을지라도, 추구하는 과정에서 두 나라의 문화적인 차이는 크다. 아마도 미국에 사는 대부분 동양인이 나와 비슷한 갈등을 겪을 것이다.

나는 11살 때 처음 한국에 갔다. 2001년 당시에는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가 유행했다.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머리에 약품을 바르고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다. 파마가 완성됐을 때 오빠는 나를 보며 젖은 강아지 같다고 놀렸다. 하지만 파마는 나에겐 색다른 경험이었고 곧 익숙해졌다.

이런 압박은 고등학교 3학년 말 다시 등장했다. 고모가 쌍꺼풀 수술을 제안한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쌍꺼풀 수술은 대학교 진학 전에 누구나 한 번 쯤 생각할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이건 동양인의 작은 눈을 둥글고 크게 만들어 주는 수술이다.

나는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다. 눈 주위에 칼을 댄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다른 사촌이 말하길 수술 후 회복될 때까지 눈꺼풀 위의 징그러운 실밥 자국을 견뎌야 한다고 했다. 그녀가 경험한 수술 중 가장 아픈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요즘도 가끔 거울을 보며 쌍꺼풀 수술을 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곤 한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할머니는 어릴 적 내 피부가 무척이나 하얗다고 종종 이야기하셨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내 창백한 피부를 칭찬했다. 이후 언어 연수를 위해 한국에 다시 갔을 때 시내 곳곳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2주 후 할머니 댁에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피부가 완전히 까매졌구나!” 하시며 자외선 차단제의 중요성에 대해서 한참 설명하셨다.

나는 인생의 첫 파마를 한국에서 했다. 부분 염색도 한국에서 처음 했다. 첫 번째 매니큐어도, 처음 받는 마사지도 목욕탕 때밀이도, 전부 한국에서 처음 해봤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도 한국에서 처음 경험했다.

지루한 도시에서 온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습이 혼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서울은 재미있고 활발한 도시다. 하지만 요즘은 점점 나 자신이 오일, 크림, 콤팩트와 마스카라 같은 화장품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다는 기분이 든다. 머리 파마를 하려면 마치 엄마, 할머니, 사촌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고 과욕만 부리지 않는다면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도 나는 예뻐 보일 것이고, 또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사람들은 각각 다르게 태어난다. 단지 어디에서 멈출지를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곤 당당하게 제 모습 그대로 날아오르면 된다.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 미국에서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 김희승이 보내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