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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0일 06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3월 10일 07시 56분 KST

의료민영화 뒤 공공의료 낙후

morguefile

[의료영리화가 바꾸는 세상] ① 칠레 의료 ‘계급화’

서민은 공공보험 가입

부자는 민영보험에 들어

손 놓은 공공의료 점점 망가져

박근혜 대통령이 보건의료계와 시민사회의 광범한 반대에도 ‘의료 영리화’ 방침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원격의료 및 병원(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 설립 허용 등에 이어 취임 한돌을 맞은 25일엔 경제자유구역의 외국 영리병원과 관련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의료 영리화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칠레에서 공공의료 시스템이 어떻게 망가지고 의료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는지, 신자유주의적 사영화 정책의 원조 격인 영국이 정권의 빈번한 교체와 막대한 재정 부담에도 공공의료 시스템인 ‘국가보건서비스’(NHS)를 왜 포기하지 않는지를 세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의료 영리화를 둘러싼 논쟁을 심화하는 데 보탬이 되길 바란다.

칠레에서는 줄을 많이 선다. 꾹 참고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기다리다 죽는다”고 비난받는 서비스가 있다. 공공의료 서비스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칠레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도 불평등하다. 의료보험에도 ‘계급’이 있다.

칠레의 의료보험은 한국과 달리 둘로 나뉜다. 정부가 운영하는 공영보험(FONASA)과 사기업이 운영하는 민영보험(ISAPRE)이다. 2011년 기준으로 공영보험 포나사에 76.2%, 민영보험 이사프레에 16.9%가 가입돼 있다. 그밖에 3%는 군인 의료보험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미가입 자영업자 등이다. 피고용자는 임금의 7%를 보험료로 내고 의무적으로 포나사에 가입해 기본적으로 공공 의료기관을 통해 서비스를 받는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면 이사프레에 가입해 민간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이사프레 가입자는 나이와 성별, 보험이 적용되는 병원 및 범위에 따라 다양한 보험료를 내야 하는데 임금의 7%가 넘는 차액은 가입자가 부담한다.

“보험료 그만 올려라” “이사프레 (보험료 인상은) 더는 안 된다”는 민영보험 무효화 지원단체의 안내문이 지난 5일 칠레 산티아고의 한 전봇대에 붙어 있다.

그러니 이사프레에 가입하려면 포나사 초과분을 낼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좋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더 많은 보험료를 평소에 내야 한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칠레 최대 민영보험사인 반메디카의 가입자당 월평균 보험료는 4만9413페소(약 10만원)다. 소득 수준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액수다.

안드레스베요대학이 2010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8년 기준으로 이사프레 가입자의 월평균 소득이 43만페소인데, 포나사 가입자는 19만3000페소다. 당시 최저임금이 15만9000페소(현재는 21만페소)니, 포나사 가입자는 최저임금과 얼추 비슷한 소득으로 살아가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의료보험감독원의 2012년 발표를 보면, 포나사 가입자들은 ‘싸서 가입했다’ ‘무료여서 가입했다’는 응답이 각각 27%, 22%이다. 이들의 최대 불만은 의료 서비스가 느리다(25%)거나 나쁘다(11%)는 것이다.

공공병원은 의사·병상 부족…민간병원은 비싼 의료비 장벽

반면 이사프레 가입자들은 40%가 ‘보험료가 비싸다’는 불만을 제기하면서도, 진료가 빠르고(33%), 서비스가 좋다(24%), 의료진이 좋다(22%) 따위를 장점으로 꼽았다.

현행 칠레 의료보험제도의 뼈대는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 뒤 마련됐다. 칠레는 1952년 국가의료서비스(SNS)를 통해 전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등 국가 중심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시절,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 의료 민영화가 대대적으로 시행됐다. 군부는 1980년 국가 의료서비스를 각 지방에 넘긴 데 이어, 1981년 민영보험 이사프레를 도입했다. 공공 분야 효율성 및 경쟁력 제고, 선택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워 정부의 구실을 시장에 떠넘긴 것이다.

공영보험 가입자들 소외 돈 못벌고 발병률 높은 계층 질 낮은 의료서비스 받아

29%만 “공공병원 만족한다” 민영보험 가입자들은 봉

소득의 10% 보험료 내고도 의료비 지출비중 OECD 최고

한해 수조원 버는 보험사들 성인 여성이 가입한다니 “임신하면 돈 드니까” 거부

희귀질환자 치료비 불어나자 “못 대준다” 버티기도

1973년에서 1987년 사이 정부의 공공의료비 지출이 40% 줄었다. 정부의 지원이 줄어드니, 공공의료기관의 서비스가 나빠졌다. 재정이 열악한 지역의 진료 수준도 그만큼 더 떨어졌다. 1999년에서 2009년 사이 공공의료기관 병상이 12% 줄었다. “선택의 자유”는 있는 사람들만의 자유다. 안드레스베요대학의 2010년 조사에서, ‘공공병원이 잘 대우한다’에 29%만 동의했다. 민간병원이 ‘잘 대우한다’는 응답은 88%나 됐다. 포나사 가입자의 51%는 ‘이사프레로 바꾸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한다’고 답했다. 이처럼 의료 불평등은 공기 같은 일상이 됐다.

정부의 공교육 외면으로 명문대학 학생은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 출신들이 대다수고, 재정이 열악한 지역 공립학교일수록 시설과 교사의 질이 떨어지는 사정과 다를 바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3년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칠레의 의료 분야 공적지출은 2011년 구매력지수(PPP) 기준 1인당 735달러로, 오이시디 평균 2414달러의 30% 수준이다.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와 터키에 이어 셋째로 낮다. 이런 공적지출은 국민의료비 가운데 46.8%로, 오이시디 평균 72.7%에 크게 못 미친다. 당연히 본인부담률이 같은 해 기준 38%로, 오이시디 평균인 20%보다 훨씬 높다.

공공의료 투자는 미진하고 본인부담률이 높다보니 의료비 부담이 만만찮다. 지난해 8살 된 딸이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해서 병원에 갔다. 이사프레에 가입했기에 병원비가 얼마 안 될 줄 알았다. 그런데 20분 대기하고, 5분 진찰을 받은 뒤 보험으로 30%를 할인받았는 데도 2만5000페소(4만8000원)가 나왔다. 약값은 별도다. 2011년 기준으로, 칠레 가계지출의 4.6%가 의료비에 쓰였는데, 오이시디(평균 2.9%)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민간보험사들은 생명보다 영리를 앞세워왔다. 지난달 말, 에리카 미야스라는 여성이 보험 종류를 바꾸려는데 보험사가 두 차례나 거부했다. 보험사 직원은 “말하면 안 되는데…”라며 “당신은 가임기 여성이고 아이를 낳으면 보험사에서 돈이 더 들어가니 혜택을 더 주는 게 이익이 안 된다”고 털어놨다. 앞서 24살 청년 세르히오 네이라가 희귀질병에 걸려 매달 3000만페소(5790만원)의 치료비가 들어가자, 보험사가 진료비 부담을 거부했다. 결국 대법원 재판까지 가고 청년이 인터넷 등에 호소한 뒤에야 보험사는 지난달 네이라의 치료비 부담을 받아들였다.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과 의료를 시장에 떠넘긴 후과다. 최근 1년간 보험사별 가입자 1만명당 민원 건수를 보면 5.5~18.7건을 기록했다.

민간병원과 계약해 운영하던 보험사들은 영리 극대화에 나섰다. 자체 병원을 세워 수직계열화한 게 대표적이다. 보험사의 비용이 계열사 병원의 매출이 되는 구조다. 칠레 의료보험 시장 가운데 반메디카, 콘살룻, 크루스 블랑카가 67%를 차지한다. 7개 보험사가 민간병원 83개 가운데 40개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보험사는 2012년 660억페소의 수익을 냈다. 그래도 보험료는 꾸준히 오른다. 이런 사정 탓에 지난해도 이사프레 보험료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와 캠페인이 끊이지 않았다. 보험료 인상 무효화를 지원하는 단체가 여럿이다.

민영보험사들이 영리를 추구하는 사이, 포나사 재정의 60%를 지원하는 정부는 돈 없고 아프거나 나이든 고위험군이 포나사에 몰리는 바람에 더 큰 부담을 떠안고 있다. 젊고 건강할 때는 경제력이 있어 이사프레를 이용하니 민영 보험사가 이윤을 챙기지만, 나이가 들어 경제력이 떨어지거나 병들어 보험사가 과도한 보험료를 요구하면 공공 의료서비스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2011년 기준, 60살 이상 노인 가운데 93%가 포나사를 이용하고 있다. 공공의료 재정의 부담이 커지는데 공공의료 시스템의 구실은 점차 약화된다. 결과적으로 민영보험사를 먹여살리느라 벌어지는 일이다. 난감한 역설이다.

이달 초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민영보험회사 반메디카의 한 지점을 시민들이 드나들고 있다.

지난 20~30년간 칠레 의료체계는 공공부문의 1차 의료기관 중심 재편 등 전반적으로 개선됐다. 오이시디의 2013년 자료를 보면, 65살 칠레 노인의 향후 기대수명이 19.6년(여성)으로 소득 수준이 엇비슷한 헝가리(18.3년), 멕시코(18.5년)보다 높다. 1000명당 1살 미만 유아사망률은 7.4명으로 헝가리(4.9명)보다 높지만 멕시코(13.6명), 터키(7.7명)보다 낮다. 하지만 심각한 의료불평등을 고려하면 이런 수치는 빛이 바랜다. 오이시디의 2013년 자료를 보면, 소득계층별 의사 면담 비율을 분석한 형평성 지수에서 칠레(0.079)는 영국(0.004)은 물론 헝가리(0.018) 등 비교 대상 17개 회원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최악의 의료 불평등 국가로 조사됐다.

결국 의료 불평등은 교육 불평등과 함께 칠레의 대표적 사회문제가 됐다. 지난해 12명의 전문가 그룹이 펴내 주목받은 ‘더 나은 칠레를 위한 95가지 제안’에서도 대안 마련이 촉구됐다. 알레한드로 페레이로 전 경제부 장관과 니콜라스 피게로아 가톨릭대 교수는 의료 분야 진단에서 “소득이 낮고 발병률이 높은 계층이 포나사를 이용하므로 포나사 강화는 기회균등을 위한 걸음”이라고 강조하고, 중기적으로 “세금으로 뒷받침되는 단일한 전국민 공공의료보험을 도입하고 민영보험은 선택적 보완책으로 전환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3월 초 대통령에 취임하는 미첼 바첼레트도 대선 때 ‘이사프레의 횡포’를 막겠다며 개혁을 약속했다. 바첼레트는 여성과 노년층, 병약자, 저소득층을 차별하는 이사프레와 관련해 보험료 관리·감독 등을 위한 특별팀을 꾸려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칠레는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과 의료가 경쟁과 효율을 앞세워 시장에 맡겨지고 영리의 대상이 될 때 일어날 심각한 부작용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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