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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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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김종대 논란을 뒤늦게 보면서 기시감이 든다.

이교수는 그저 환자를 '집도' 대상으로서 건조하게 마주하고(그러나 그 신체에는 최대한의 성실성으로 마주하면서), 그렇게 신체가 하나의 신체일 수 밖에 없었던 시간에 본 일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때 파악된 언급된 기생충이니 분변이니 역시 신체에 부수된 건조한(신체적 의미만 갖는) 대상일 뿐이다. 그런 대상에 대한 언급을 문제삼는 건 김의원 자신이, 기생충과 분변에 과도한 의미를 두었다는 얘기일 뿐.

김종대 의원은 환자의 인권을 말하면서 에이즈환자를 예로 들었고,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 같다. 하지만 "에이즈"가 말해서는 안되는 개인정보임에 우리가 공감하는 건 "에이즈"라는 병이 사회적차별 대상임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기생충도 물론 우리가 어렸을 땐 수치스러운 사안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다른 공간에서 온, 어쩌면 다른 시간대를 살다 온 북한사람의 신체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수치(羞恥)로 보는 것은, 그러니까 감추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은 이미 그 시선자체가 감성/혹은 정치적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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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렇게 만든 것이 그저 "인간의 존엄"을 생각한 감성적인 것이든, 기생충이 "북한"을 표상하는 것으로 고정될까 두려워서든, 그의 시도는 "기생충 소지자"에 대한 차별적 감성이 만든 것일 수 밖에 없고, 그런 한 그 차별을 오히려 고정시키는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다른 시간/다른 공간을 산 결과가 만든 신체는 수치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북한남성들의 왜소한 신체조차 우리는 감추어야 할 개인 정보로 취급해야 한다. 중요한 건, 눈앞의 대상을 어떻게든 열등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우위성을 주장하려는 시도자체에 대한 항의일 뿐, 대상자체의 상태가 아니다.

나 역시 건조하게 (관리)"매춘"을 다루었다. 이미 학계에서는 모두가 건조하게 다루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건 위안부할머니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을 굳이 감추려 했던 이들이(정치적 목적이든,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든, 그 행위 자체가 위안부를 당당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시 차별구조를 공고히 한다) 본인에게 가서 "할머니를 매춘부라고 했어요!" 라고 말해 문제시한 게 '제국의 위안부' 고발 사태였다.

중요한 건 그걸 다루는 이가 어떤 맥락에서 다루었는지다. 이국종 교수가 어떤 맥락에서 한 사람의 귀순병사를 다루었는지도 이미 분명하다. 그걸 무시 혹은 간과하고 비난한 김종대 의원의 행위는 남보다 풍부한 감성 혹은 정치성이 시킨 것이겠지만, 과도한 감성과 정치성은 종종 당사자에 빙의해 시간과 공간을 흐뜨려 놓고 맥락을 소거시킨다. 그러면서 정작 당사자조차 소거되곤 한다.

문제는, 그 대부분의 시도가, 인식의 새로운 전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태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회적 소모만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