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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간판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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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각 화려한 네온사인이 서울의 애환과 향락을 노래하던 때가 차라리 나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크기와 서체와 디자인까지 똑같은 간판이 서울을 뒤덮고 있다.지금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간판 공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붙인다. 어딜 가도 똑같은 모양으로. 홍대, 삼청동, 이태원 등 몇몇 지역을 제외할 수 있을 뿐이다. '도시 미관 개선'이란 이름으로 지자체가 주도한 사업이 결정타였다. 공무원들이 "난립했던 불법 간판을 정리했다"며 자화자찬하는 사이 45센티미터 고딕체 문자가 도시를 점령했다.

지자체가 개선사업을 정례화한 지난 10여 년 동안 가게 주인의 간판에 대한 애착이 사라졌다. 지자체에서 때 되면 알아서 갈아주는 공짜 상품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서울의 25개 구청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일반적인 간판 제작 단가는 2백50만원이다. 2백50만원을 기준으로 추가 비용만 가게 주인이 부담한다. 공짜, 혹은 몇 십만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새 간판을 달아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다.

간판 개선사업을 진행하며 가게주인을 설득하는 핵심은 공짜로 달아주는 새 간판이다. 사업 완료 후 배포하는 보도 자료에는 디자인을 통한 미관 개선이라는 보기 좋은 명분이 잔뜩 들어 있지만 결국 돈 문제라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공짜로 간판을 얻고, 담당 공무원은 불법 간판 정비라는 실적을 올린다. 소위 '윈-윈' 하는 거래다.

냉정하게 말해서 불법을 합법으로 전환할 목적이라면 단속이 훨씬 합리적이다. 불법 광고물에 대해 계고장 3회 발송 후 이행하지 않으면 행정집행. 하지만 단속에는 반발이 따르고 지역 민심이 요동친다. 구청장의 신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결국 최상위에는 정치가 작동한다. 이미 10여 년 넘게 이어진 사업으로 가게 주인들이 공짜 간판에 길이 든 상황이다. 단속의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공짜로 퍼줬기에, 아직 개선사업을 하지 않은 지역 상인들이 형평성의 논리를 들이대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옥외광고물 담당 공무원도 상황을 모르지 않는다. 간판 개선사업을 더 진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자조도 심심찮게 들린다. 시범사업으로 진행했던 초기와 지금의 방향성이 전혀 다르다. 지역의 특정 구역을 선정해 새로운 형태의 간판을 선보이고 자율적으로 확산되게 한다는 것이 애초의 시범사업 목적이었다. 전 지역을 공짜로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구역을 정해 소규모로 진행했다. 지역 주민들에게 미관 개선이라는 주제의 '케이스 스터디'를 선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2004년,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판이 뒤집혔다.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가 성공사례로 퍼졌고, 전국의 담당 공무원들이 그대로 베끼기 시작했다. 간판 개선사업으로 이름이 바뀌어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서울의 간판은 그야말로 'Ctrl+C', 'Ctrl+V'로 채워졌다. 불법을 합법으로 전환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밀어붙였다.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간판 제작 업계에서 급부상한 형태는 '채널사인'이다. 문자 하나하나를 입체적으로 제작하는 방식을 말한다. 채널사인은 그림이 아닌 문자로 가게를 표현해야 해서 간판이 단조로워지는 단점이 있다. 쉽게 읽히지만 뇌리에 남는 건 없다. 반면 기존 옥외광고 업계의 보편적인 제작 방식이었던 판류형 간판은 그림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IMF 이후 인수 합병의 폭풍 속에서 은행권에서 CI를 정립하며, 전국에 수많은 지점에 판류형 간판을 설치했던 것은 이미지 통해 브랜드를 각인시키기에 유리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종로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는 간판제작 업계에 변화를 몰고 왔다.

오세훈 전 시장이 재임하던 2008년에는 한술 더 떠 '디자인 서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주요 골자는 간판에 표기하는 문자의 45센티미터 크기 제한이었다. 물론 가이드라인은 법적 구속력이 없었지만, 실질적으로 법 위에 군림하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됐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자치조례제정에 서울시의 가이드라인을 그대로 적용했다. 45센티미터 채널사인 간판의 득세는 판류형 간판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간판 제작 방식 중 하나가 정책에 의해 사라진 셈이다. 또한 간판에 주로 사용했던 광원인 형광등, 네온을 급속도로 밀어내며 LED가 그 자리를 자치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저탄소 녹색 성장'을 내세우며 LED 사용을 장려했다.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며 LED가 간판 제작 업계의 주요 광원이 됐다. LED 광원의 특성 탓에 판류형 간판의 몰락은 가속화되고, 간판 형태는 채널사인으로 더욱더 굳어졌다. 형광등은 조도, LED는 휘도가 좋은 광원이다. 전체 면적을 고르게 밝히려면 휘도보다 조도가 좋아야 한다. LED를 활용해 제작한 판류형 간판에는 일부분이 죽어서 어두워지는 흑화 현상이 발생 했다. 45센티미터 채널사인은 그야말로 LED를 위한 제작 방식이었다. 적은 LED를 사용해도 간판이 불야성처럼 빛났다. 정책이 간판 제작 방식을 단일화시켰고, 서울을 거대한 간판 공장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제조업 특유의 하청문화가 방점을 찍었다.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간판 개선사업의 실질적인 제작은 하청업체에서 담당한다. 제작 업체가 입찰 요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사업권을 수주한 업체가 물량을 감당하지 못해 재하청을 주는 경우다. 하청을 거칠수록 제작 단가는 떨어진다. 하청업체는 최저가 간판 제작 소재를 찾아 헤맨다. 품질 경쟁이 아닌 단가 경쟁이다. 공무원들이 주장하는 전기세 절감을 충족하려면 LED 간판이 최소 2년간 고장 없이 버텨야 초기 설치비용 대비 감가상각이 맞는다. 요식업 계의 개폐업 주기, LED의 내구성 등 다양한 이유로 2년 넘게 버티는 간판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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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서 본 가장 잔혹한 간판은 필동면옥이었다. 굳이 면식가가 아니어도 이름만 대면 알법한 전통의 냉면집. 필동면옥 측면에서 오래도록 가게를 상징했던 큼직한 네온사인은 삼복더위가 오기전 철거됐다. 그리고 인근지역 간판개선사업을 하며 새로 설치한 간판. 아무리 봐도 블로거들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 난, 지난주에 개업한 냉면집 간판 같다. © 사인문화 DB

간판 개선사업 후 관리 대책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공무원에게도, 제작업자에게도 정해진 시일 내에 설치하는 게 중요했지 그 이후는 관심 밖이었다. 간판이 고장 나면 가게 주인은 임시방편으로 불법 현수막을 게시한다. 공짜 상품이다 보니 내 돈 들여 고칠 생각을 안 한다. 간판을 바라보는 관점은 마땅히 다를 텐데, 놀랍게도 공무원, 제작업자, 가게 주인의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한 가게의 얼굴인 간판이, 시장표 양말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디자인이든 품질이든 하여튼 있기만 하면 되는 것.

간판에 디자인 요소를 적용하는 건 꿈도 못 꾼다. 간판 개선사업을 할 때마다 반복되는 말은 "디자인 요소를 적용해 미관을 개선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디자인은 미용실에 가위 그림을 넣거나, 고깃집에 돼지 캐릭터를 넣는 수준이다. 몇 달 전 취재 당시 만난 한 공무원은 유럽 여러 국가의 간판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이번 개선사업에서 추구한 게 잘츠부르크였어요!"라고 말했다.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근데 여기선 안 되더라고요."

공무원은 막연히 외국 사례를 적용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서울의 자연과 건물 구조, 생활 방식이 외국과 다르다. 홍대, 이태원, 성수동 등 흥미로운 동네에서 한두 시간만 발품을 팔아도 눈길을 끄는 간판이 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서울에 이미 존재하는 간판을 통해서 현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은 재미없는 간판을 만들 수밖에 없는 제도 위에서 '유럽식'을 이야기한다. 간판을 공짜 상품으로 인식하는 사업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가게 주인은 자신의 가게에 어떤 간판을 달지 생각하느라 바빠야 한다. 서울의 도시 경관에 기여하는 간판은 그가 스스로 간판을 고민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자체가 할 일은 그의 고민에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성수동에 '커피식탁'이란 카페가 있다. 약간 탁하지만 가벼운 남색 페인트로 칠한 벽에 철제로 '커피식탁' 네 글자만 얹은 간판이 걸려 있다. 몹시 간결하고 예쁘다. 취향의 영역에서 논의된대도 대체로 거슬리지는 않을 것이다. 카페 주인은 "식탁은 음식을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간이잖아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라며 상호와 간판을 소개했다. 좋은 간판이다. 가게 주인의 의도가 보이고 애착이 드러나는 간판. 지자체가 아무리 새로운 간판을 달아도 도시 풍경이 나아지지 않는 건 가게의 이야기가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25개 구청 대다수가 올해도 간판 개선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타이어 전국에서 제일 싼 집' 같은 요사스런 간판을 정리했다는 것에 그저 만족해야 할까?

* GQ KOREA에 실린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