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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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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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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남성 예비역 장군들의 자리로 통하던 차관급 보훈처장에 여성 예비역 중령이 임명된 것은 문재인 정부의 태풍급 개혁 인사를 예고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앙지검장 인사도 검찰 기수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혁명정부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 인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중 대결 속의 한반도 안보 위기라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이때, 경쟁적으로 난폭하고 예측 불가능한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가 한반도에 어떤 재앙을 몰고 올지 모르는 이때, 시진핑이 북한 압박에는 석유 공급 중단 같은 결정적인 카드를 쓰지 않고 한국에는 가혹한 사드 보복을 서슴지 않는 이때, 문 대통령은 외교부 장관에도 강경화라는 뜻밖의 인물을 내정했다. 강 내정자는 국내(외교부 본부)보다는 유엔기구에서 더 오래 근무한, 직업외교관들이 말하는 정통외교관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타성과 단조로운 사고에 빠져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자동으로 굴러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최소한 대사 지위까지는 보장받는 정통외교관보다는 유엔 무대에서 시야를 넓힌 인물이 시한폭탄 같은 오늘의 한국이 요구하는 외교부 장관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여기까지는 문 대통령의 생각이 옳다.

그러나 과연 강경화가 옳은 선택인가. 그는 당장 위장전입에 걸렸다. 위장전입은 문재인 대선후보가 집권하면 반드시 청산하겠다고 공약한 5대 적폐의 하나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위장전입자들을 총리와 장관직에 임명하는 데 야당과 국민들의 '양해'를 구했다.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부정(적폐 청산)의 부정(양해)"이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다. 문 대통령의 민정수석비서관 조국은 2010년 8월 한겨레신문 기고에서 위장전입을 "좋은 학군으로 이사하거나 주소를 옮길 여력이나 인맥이 없는 시민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이라고 썼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의 전형 아닌가. 그 대통령에 그 보좌관이다.

위장전입 시비는 국회 인사청문회에 맡기고 강 후보자가 오늘의 한국 외교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를 가려 봐야 한다. 피우진 보훈처장처럼 강 후보자도 여성으로서 상징성이 높다. 지금 독일·프랑스·일본의 국방장관이 여성이다. 미국은 두 명의 뛰어난 국무장관을 배출했다. 그러나 한국 같은 나라의 외교는 상징성으로 되지 않는다. 미국·독일·프랑스·일본과 달리 한국은 실존적 안보 위협을 받는 나라다. 강경화 후보자는 유능한 유엔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고도의 외교 전략과 상상력과 추진력과 철벽도 뚫고 나갈 돌파력이 있는가는 의문이다. 특히 그에게 4강 외교의 경험이 없는 것이 최대의 약점이다. 국내 경험이 일천한 것도 흠이다. 오늘 한국의 외교부 장관은 부총리로 격상해도 손색이 없을 인물이어야 한다.

강 후보자는 유엔기구에서 쌓은 경험으로 한국이 직면한 도전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목격하듯이 북한 핵·미사일은 유엔에만 가면 추상적·관념적 문제로 밀리고 유엔대사들의 현란한 말의 성찬에 휘말린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에 허풍스러운 5종경기 선수가 있었다.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그가 말했다: "로도스섬에 갔더니 올림픽 선수 뺨치는 성적이 나오더라". 듣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 철학자 헤겔은 이 우화를 현재성과 현장성이 중요하다는 말로 인용했다(법철학강의 서문). 카를 마르크스도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를 "바로 이 자리에서 네 실력을 보이라"는 뜻으로 썼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위기의 한반도는 강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로도스다. 그는 여기서 뛸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전운이 걷히지 않는 한국은 유엔이라는 관념의 무대, 추상의 무대가 아니다. 다시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강 후보자에게 외교부 장관 자리는 십자가 위의 장미다. 그냥 손을 뻗기만 하면 딸 수 있는 장미가 아니다. 국회 청문위원들은 그의 도덕성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 나라 외교 수장으로서의 능력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문 대통령의 상징 취향에 막중한 한국의 외교를 맡길 수는 없다.

강경화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보고서 채택을 낙관할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위장전입에 대해 거짓말까지 한 강경화 후보자가 이낙연 총리의 경우처럼 적폐 청산 공약을 비틀어서라도 외교부 장관을 시킬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인가. 아니면 강 후보자의 여성으로서의 상징성을 버리기가 아까운가. 이건 아직은 잘나가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뢰의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