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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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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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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중도 사퇴했다. 그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비통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사임 성명을 읽었다.

"...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대통령직을 떠나는 것은 본능적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나는 미국의 이해를 앞에 둬야 했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비통한 감정을 뒤로하고 나라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임이 치유의 시작을 앞당기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국민에게 입힌 상처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덮으려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이어가다 대변인 론 지글러를 시켜 "이제 이 방법은 작동이 안 된다(inoperative)"는 논평을 내고 자진 사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잘못으로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것을 사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빠른 힐링(치유)을 희망했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서울 삼성동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집 앞 골목길에 모인 지지자들을 상대로 "시간이 걸려도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탄핵 불복을 선언했다.

박근혜와 닉슨은 어디가 다른가. 닉슨에게는 큰 것을 보는 대국관(大局觀)이 있었다. 반면에 박 전 대통령은 아직도 사태를 총체적으로, 개념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에게는 전 아이슬란드 대통령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말한 "무엇이 정말로 국가에 이익이 되는가를 국민 전체의 보편적 이익의 관점에서 보는 윤리적 이해력(ethical literacy)"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청와대에서 20년이나 살았다. 궁궐 같은 청와대에서 수많은 비서의 보좌를 받으면서 사는 데 익숙한 박 전 대통령에게 삼성동 옛집은 독거의 황량한 공간일 것이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얼음 같은 고독일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 하루빨리 치유돼야 한다. 집 앞 골목길의 지지자들의 아우성은 그를 점점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권력 남용과 뇌물수수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뒤따를 재판 과정 내내 나라를 탄핵 지지자와 반대자의 분열·대결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박 전 대통령에게는 치유의 자산이 있다. 그는 2013년 중국 방문 때 시진핑 주석의 모교인 칭화(淸華)대에서 강연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한국의 대통령은 대학 측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칭화대의 대학원장을 지낸, 서예로도 유명한 철학자 펑유란(馮友蘭)이 89세이던 1984년에 쓴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798~756)의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이라는 시의 족자다. 박 전 대통령이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를 메모까지 하면서 탐독한 것을 안 펑유란의 외손녀가 간직하고 있던 족자를 선물로 내어놓았던 것이다.

시의 셋째와 넷째 줄이 박 전 대통령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질 만하다. '낙양의 벗들이 내 안부를 묻거든(洛陽親友如相門)/ 옥 항아리 속 한 조각 얼음같이 맑게 살고 있다고 전하게(一片氷心在玉壺).' 박 전 대통령이 이 족자를 청와대에 두고 나왔는지, 집으로 가지고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를 그렇게 열독했다면 펑유란이 쓴 왕창령의 시를 잊었을 리 없다.

박 전 대통령은 가끔 요즘 유행하는 '멍 때리기'라도 하면서, 그리고 좋아하지만 칠 기회가 없었던 피아노를 치면서 옥 항아리 속의 한 조각 얼음 같은 사심 없고 냉철하고 맑은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는 골목길에서 아우성치는 지지자들을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지지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존재감 과시와 공직 출마를 위한 보수층의 인기몰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떠나는 사람은 그 뒷모습이 고와야 한다. 검찰 수사와 재판은 법의 길을 간다. 그러나 법적 판단은 치유가 아니다. 법의 궁극에 있는 것은 사람이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들과의 화해를 서두르기를 기대한다.

전직 대통령은 자연인이라도 공공선에 봉사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