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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공감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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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가 발음되는 순간, 당신의 마음에 너른 파문이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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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아이 캔 스피크>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제목을 통해 물음표가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거다. '무엇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말할 수 있다'가 아니라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일까? 물론 직접 영화를 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그리고 사실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아이 캔 스피크'라는 제목에서 생략된 목적어가 만천하에 알려진 지 오래다. 이 글에서도 딱히 그것을 가릴 생각이 없다. 그래서 혹시라도 <아이 캔 스피크>에 대한 일말의 정보도 듣지 않고 영화를 보고자 하는 관객이라면 이 글을 건너뛰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앞서 던진 두 가지 물음은 <아이 캔 스피크>라는 작품에 발휘된 명민한 재능과 성실한 온기를 설명하기 위한 포석이다.

필연적으로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다. 해소되지 않은 억울함이나 청산하지 못한 부조리를 재현하는 영화란 필경 그런 팔자를 타고난 서사일 수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든 활화산 같은 클라이맥스가 마련된 무대다. 다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폭발시킬 것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아이 캔 스피크>는 멀리 돌아가는 법을 선택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목적어를 배제시킨 제목이 야기시키는 물음을 향해, 관객들과 함께 다다르고자 하는 종착지라 할 수 있는 어떤 목적어를 향해 서서히 나아간다. 박민재(이제훈)와 나옥분(나문희)이라는 두 인물의 갈등과 화해를 바퀴 삼아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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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구청으로 발령받은 9급 공무원 민재는 출근 첫날, 8000건이 넘는 민원을 넣어 구청 공무원들이 기피하는 블랙리스트 1호 인물로 꼽힌다는 할머니 옥분을 만난다. 원칙주의자인 민재 입장에서 옥분은 안하무인의 무법자에 가깝다. 그동안 구청 내에서 거칠 것이 없었던 옥분에게 민재는 보기 드물게 자신을 막아서는 장애물이다.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관계다. 필연적으로 갈등한다. 그리고 갈등은 역시 필연적인 화해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남북처럼 대치한 두 인물의 관계에서 판문점 역할을 하는 건 바로 영어다.

옥분에게는 영어를 배워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우연히 민재가 외국인과 능수능란하게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사실 민재는 구청 동료들 몰래 7급 공무원 승급 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오랫동안 영어 실력을 닦아왔다.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길 청한다. 민재는 거절하기 급급하다. 하지만 민재의 마음을 돌리는 계기가 찾아온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탓에 동생 영재(성유빈)의 보호자 노릇을 하던 민재는 동생에게 저녁밥을 차려주는 옥분의 존재를 알게 되고, 우연히 맞닥뜨린 옥분의 온기 가득한 마음 앞에 민재의 냉랭한 마음도 녹는다. 그리고 민재는 일주일에 세 번, 옥분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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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분과 민재는 전혀 다른 사람 같지만 의외로 닮은 구석이 많다. 민재에게는 부모가 없고 옥분에게는 자식이 없다. 옥분이 영어를 배우고 싶은 건 멀리 떨어진 동생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다. 민재가 영어를 배운 건 가까이 있는 동생에게 더욱 든든한 존재가 돼주고 싶어서다. 유사한 결핍을 지닌 존재가 연대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을 움직인다. 물론 그 전제가 되는 건 마음을 움직일 만한 매력을 지닌 이야기와 캐릭터의 존재 유무다. 일단 <아이 캔 스피크>는 서사의 설계가 탁월한 작품이다. 옥분과 민재의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옥분의 내밀한 사연이 두 차례 허물을 벗게 되는데 그 점진적인 흐름의 설계가 탁월하다. 관객은 영어를 배워야 하는 옥분의 입장에서 영화에 몰입하면서도 민재의 입장으로 호기심을 가진다. 결국 관객은 민재의 시선으로 영화를 따라가며 옥분의 마음으로 영화에 몰입한다. 이성적인 시선으로 영화적인 상황을 주시하면서도 영화가 설치한 감정적 뇌관을 차례로 밟을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캐릭터들이 매력적인 탓이다. 물론 표면적으론 그렇지 않다. 옥분은 타인의 일상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인물이다. 무례해 보이는 구석도 있다. 민재는 딱히 온정이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인물이다. 어딘가 비열한 구석도 느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다. 그들뿐만 아니라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구청과 시장 사람들 모두가 그렇다. 그들 가운데서 영화는 옥분과 민재의 일상을 선택해 보다 깊게 관객에게 전시한다. 그리고 영화가 제시한 흐름 속에서 관객은 옥분과 민재의 이면적인 삶의 고뇌와 맞닥뜨리게 된다. 옥분에게는 닿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민재에게는 지키고 싶은 책임감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두 사람에게 는 영어가 필요하고, 필요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두 인물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끌어안게 되고 두 인물이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는 순간들을 통해 영화가 바라는 대로 웃고 울게 된다. 그리고 그 웃음과 울음은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주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을 위한 사전적인 통과의례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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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많은 매체를 통해 알려졌듯이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를 관통하는 작품이다. 허구적인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전진하지만 결국 실물의 역사로 종착한다. <아이 캔 스피크>의 종착지가 되는 역사는 HR121, 즉 미 하원의회에서 채택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다. 1997년 일본계 미국인인 미 하원의원 마이클 혼다를 비롯한 하원의원들에 의해 발의됐지만 10년 만인 2007년에 채택된 이 결의안은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역사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은 이 결의안 채택 논의를 위해 2007년 2월 15일 미 하원의회에 마련된 공개 청문회에 참석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의 대역이자 화신이다. 결국 <아이 캔 스피크>는 관객들을 옥분과 함께 2007년 2월 15일 미 하원의회의 객석에 앉은 청중으로 소환하는 마술이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미리 다 알고 영화를 본다면 오히려 영화를 보는 동안 의아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극 후반부에 다다를 때까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서사가 등장할 것이란 예감조차 들지 않기 때문이다. 소소한 유머와 소박한 드라마로 점철된 초·중 반까지의 흐름에서 어떠한 기미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가능한 한 위안부 문제라는 무거운 소재를 짊어지는 시간을 미뤄둠으로써 그 주제 의식에 확실하게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다. 그리고 민족적 채무처럼 끌어안고 있었던 위안부 문제라는 역사적 엄중함을 산뜻한 이야기에 담아 간편하게 떠먹인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라는 엄중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공감하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단정짓지도 않는다. 관객의 감상을 압사시키기보다 차근차근 설득할 수 있는 요량을 키우고, 영화와 같은 편에서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공감대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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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하건대 영화상에서 '아이 캔 스피크'라는 제목이 발음되는 단 한 번의 순간, 당신의 마음에 미세한 파문이 일 것이다. 마치 잔잔한 수면 위로 퍼지는 동심원처럼 고요한 울림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말할 수 있다'는 선언은 위로받지 못한 채 홀로 감내해야 했던 어떤 세월과 그 언어로 종착하는 세월 내내 어쩌면 모두가 짊어지고 있었을 미안함과 무력함을 위로하는 주문과도 같다. 모두가 함께 끌어안고 있어야만 했던 통증을 확인하는 심중함과 그러한 통증을 모두 함께 확인하고 다독여주는 배려심,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큰 소리로 웅변하는 대신 낯설지 않은 표정을 짓고 뻔하지 않게 설득해 내는 재능의 결과물을 목격할 기회란 언제나 귀하고 중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재능을 견고하게 떠받치고 생생한 숨을 불어넣어 관객과 대면할 기회를 열어주는 배우들의 공도 크다. 나문희는 영화를 채색할 다양한 정서를 조합하고 결정하는 팔레트이자 결과적으로 영화를 채색하는 붓과 같다. 그리고 이제훈은 그 맞은편에서 캔버스처럼 자리해 영화의 감정적 흐름에 충실히 복무하며 관객들의 감상적 길잡이 노릇을 한다. 동시에 영민하고 성실한 리액션으로 나문희의 연기를 수식함으로써 영화의 감정선을 더욱 두껍게 덧칠한다. 또한 각기 비중이 다른 수많은 조연 배우도 저마다 명확히 자리하며 너른 공감대를 확보한다. 결국 이는 위안부 문제가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의 사연이며 누군가에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일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만든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필요도 없이 체온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는 공감의 온도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따뜻한 이야기로도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뜨겁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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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콰이어> 10월호에 실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