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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가 찾은 〈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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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항상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돌고 도는 인물들의 애환을 웃음에 녹였다. <옥자>는 달랐다. 봉준호는 갈 길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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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옥자>가 2010년부터 구상한 이야기라고 밝혀왔다. 그 과정에서 옥자가 거대한 동물이라는 정보가 더해지며 항간에는 <괴물>에 이은 봉준호의 새로운 괴수물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봉준호는 "옥자라는 이름의 사연 많은 동물과 어느 산골 소녀의 뜨거운 우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동시에 "옥자와 소녀를 둘러싼 미친 듯한 세상이 더 괴물 같다"는 힌트를 남겼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옥자>는 거대한 슈퍼돼지 옥자를 구하기 위해 강원도 산골에서 뉴욕으로 날아가는 소녀 미자(안서현)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소녀를 삼키는 괴물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심적으로도 동적으로도 명쾌하다.

사실 봉준호의 영화 속 인물은 대부분 무언가를 쫓아 어디론가 내달리곤 했다. 동네에서 연이어 실종되는 강아지 납치범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쫓는 남녀(<플란다스의 개>), 시골 마을에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살인한 뒤 감쪽같이 흔적을 감추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들(<살인의 추억>), 괴물에게 납치당한 막내딸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족(<괴물>),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아들의 결백을 밝히겠다며 진범을 찾아 나서는 엄마(<마더>), 기차 꼬리 칸에서 폭압받는 빈민들의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절대 권력자가 자리한 머리 칸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설국열차>). 저마다 무언가를 지키거나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군상이란, 봉준호의 세계를 밀고 나가는 다리이자 바퀴이며 심장이자 엔진이다. <옥자>의 미자 역시 그렇다.

그들이 하나같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이 세계에서 힘을 부릴 수 없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괴물에게 끌려간 손녀이자 딸이자 동생을 찾을 수 있는 길은 그들 스스로가 괴물을 찾아내는 길뿐이다.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아들의 결백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하는 엄마 역시 그렇다. 부녀자 연쇄 살인마를 뒤쫓는 형사들의 무능력한 헛발질은 정의감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대적 열악함을 통해 패배적인 여운으로 내려앉는다. 다들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적의 실체를 알지 못하면서도 매일같이 맞서고 내달리고 몸부림친다. 그래서 그들의 안간힘은 코미디로 떠오르다 끝내 페이소스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봉준호가 만든 세계의 역동성은 그런 군상의 안간힘에서 비롯되는 감정적인 스펙터클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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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옥자>는 앞서 나열한 봉준호의 전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 명확한 영화다. <옥자>는 미자의 동선을 따라 달려나가는 작품이다. 미자는 옥자를 찾기 위해 강원도 산간에서 서울로, 뉴욕으로 달려가고 날아간다. 관객 역시 미자와 함께 강원도 산간에서 서울로, 뉴욕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비틀린 야심과 폭력적인 만행을 목도한다. 비좁은 세계를 벌려 더욱 넓고 복잡한 세계로 달려간다. 미자의 물리적 체험이 팽창할수록 관계 또한 확대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미자가 옥자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미자의 동선에 새로운 이해관계가 따라붙을 뿐이다. 물론 그런 관계를 통해 미자의 동선에 동력이 더해지지만 어쨌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인물은 거침없이 나아간다. 다만 예상할 수 없는 기이한 풍경을 거듭 목격하는 여정을 통해 관객의 볼거리를 확보해나가는 셈이다.

<설국열차> 이전까지 봉준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불확실한 실체를 쫓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 실체가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장소의 주변을 뱅뱅 돌고 배회하는 동선이 발생한다. 일정한 공간을 맴도는 인물들이 그 안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입체적인 서사의 꼴이 확보되고 극의 밀도가 채워진다. 반대로 <설국열차>와 <옥자>는 명확한 대상을 향해 돌격하는 이야기인 만큼 인물들은 직선주로를 내달리듯 거침없이 나아간다. 멈춰 설 순 있지만 되돌아 가지 않는다. 시행착오 조차도 판이한 공간에서 펼쳐지므로 모든 순간이 새로운 서사로 나열된다. 그만큼 서사가 평면적으로 길게 나열 되는 영화처럼 보인다. 봉준호가 한국에서 만든 영화에선 불분명한 결승선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의 정서가 주요했다면, 한국을 벗어나 만든 두 편의 영화에선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는 액션의 쾌감이 보다 중요해 보인다. 전자에선 '어디로 가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후자에선 '어떻게 가야 하는가'가 중요해졌다.

그만큼 <설국열차>와 <옥자>에서는 시행착오의 코미디가 줄어든다. 봉준호 특유의 '삑사리'가 발생할 여지가 적은 것이다. <설국열차>와 <옥자>에서 봉준호 특유의 위트가 줄어든 것도 그래서다. 특유의 위트를 살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건 영어 대사를 쓰는 외국 배우들이 한국적인 정서를 녹여 낸 봉준호 특유의 블랙코미디를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공백일지도 모른다. 송강호의 등장을 통해 봉준호식 유머가 강화되는 <설국열차>의 사례는 좋은 근거가 된다. 한편 <옥자>에선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인물이 자기 편의대로 통역을 주도하면서 주변 인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언어적인 이해 차이를 신선한 위트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반면 외국 배우들의 대화 분량이 길어질수록 극적인 상황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강박이 느껴지고 흐름이 느슨해진다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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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는 <설국열차>에 비해 보다 실생활에 밀착한 교훈극이다. <설국열차>는 자본주의 세계관에서 심화되는 빈부 격차를 통해 계급화된 사회를 열차라는 직선적인 이미지에 투영하고 전시한 작품이다. 그래서 아마도 영화를 본 관객은 저마다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기차 칸을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머무를 수 있다고 여겨지는 기차 칸에 어울리는 영화적 관념을 선택했을 확률이 크다. 빈부 격차에 따라 영화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지는 셈이다. 하지만 <옥자>는 경계가 낮은 화두를 품고 있다. <옥자>를 본 대중은 당장 "고기를 먹어도 되는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가 소비하는 육류는 어떤 방식으로 유통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건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쉽게 뛰어 넘는 질문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옥자>는 봉준호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감상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자가 옥자를 찾는 건 집을 나간 반려동물을 찾는 심리와도 유사하다. 특별히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옥자>는 봉준호가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관객에겐 되레 의표를 찌르는 결과물일 것이다. 덕분에 봉준호의 필모그래피를 열심히 쫓아온 관객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단순한 세계관으로 점철된 영화처럼 보이겠지만 <옥자>는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완성한 글로벌 프로젝트다. 봉준호는 <옥자>를 통해 보편적인 감성과 설득을 위해 전세계적인 언어로 다가서기 위해 내달리는 트랙 위에 서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봉준호 자신의 말처럼 넷플릭스의 지지가 완벽하게 전폭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옥자>는 봉준호가 대중적인 감성의 영화를 나름의 자아 안에서 완성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근거로서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봉준호는 <설국열차>에 이어 <옥자>를 통해 또 한번, 언어 장벽이 있는 외국 배우들과 스태프들, 그리고 제작·투자 관계자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며 영화적 세계관을 팽창 시켜나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는 <옥자>의 미자처럼 몸소 세계로 나아가 자신의 영화를 쟁취하는 직선주로의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리고 <설국열차>와 <옥자>를 통해 봉준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장하면서도 감독 본인의 인장을 찍을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증명해냈다. 한편으론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던 투수가 직구 승부를 거듭하며 자신의 구력을 판단하는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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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옥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옥자의 눈망울과 미자의 속삭임이다. 미자는 옥자의 큰 귀에 입을 묻고 무언가를 속삭인다. 관객은 그 속삭임의 내용이 무엇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동시에 <옥자>에서는 옥자의 선한 눈망울을 적잖게 포착하는데, 영화의 중요한 대목에서 미자는 옥자의 눈을 통해 옥자의 심경을 해석해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옥자>는 직접적인 언어로 소통할 수 없어서 심연으로 교감해온 친구를 고깃덩어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는 소녀의 모험담이다. 동화적인 감성과 현실적인 냉소 그리고 극적인 합리가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 결과적으론 보편적인 울림을 획득하면서도 끝내 무언의 희망을 믿게 만든다. <옥자>는 그런 영화다. 봉준호는 여전히 봉준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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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QUIRE KOREA에 실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