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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人터뷰] '밀정'의 김지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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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다룬 영화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조금은 의아했고, 한편으론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김지운 감독이 아픈 역사를 헤집으며 뜨거운 공분을 부를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마음을 식히고 바라볼 수만은 없을 듯한 시대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김지운 감독의 작품 가운데 이례적인 한 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밀정>이 공개됐다. 아마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뜨거운 온도로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어쩌면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다단하고 모호한 심리를 품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섞이지 않는 냉기와 온기가 등을 맞대고 한 몸을 이룬 듯한, <밀정>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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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첫 주에만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압도적인 흥행세인데 아무래도 대자본이 투자된 작품이니 흥행에 대한 부담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뭔가를 과시하고자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 이상, 투자된 자본을 회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된다는 건 중요하다. 물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욕심으로 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지만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상업적 성과는 거두길 바란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자격을 인정 받기 위해선 대중과의 접점을 계속 증명해야 하니까.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나 배우들의 헌신과 열정을 봐온 입장에선 그들에게도 성과로 여겨질 만한 결과를 책임지는 감독이 되고 싶다. 결국 상업적인 성공이 그들을 위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느 정도 흥행을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3년 전의 인터뷰에서 "항상 지금의 모순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에 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라고 말했다. <밀정>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또 하나의 결과물일 텐데.
전작의 모순과 욕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현재의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언제나 현재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진전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인다. 다만 영화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해명의 강도가 높아지니 해당 작품이 완전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보이고, 아직도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항상 아직 대표작이 없다고 말해왔는데 <밀정> 역시 대표작은 아닌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닌가?(웃음)
쉽게 얘기해서 내 역량이 내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차이를 보는 게 생각보다 괴롭다. 그래서 내 영화를 편하게 보기도 힘들다. 결국 내 역량과 내 눈높이의 차이를 최대한 좁혀나가고 일치시켜서 내 영화를 남의 영화처럼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경지까지만 갈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든 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밀정>의 장르가 '콜드 누아르'라고 직접 언급했는데 '누아르'라는 장르명을 '콜드'라는 단어로 수식하는 의도가 보다 중요해 보인다.
일단 비정하고 냉혹한 스파이들의 세계를 바탕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콜드'라는 단어의 온도가 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누아르 세계관 특유의 명암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데 <밀정>은 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누아르이길 바랬다. 그래서 의상을 비롯한 전반적인 미장센에 블랙이나 블루 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차가운 정서를 담아내고 싶었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감추거나 눌렀기 때문에 영화의 감정 또한 차갑게 느껴질 거라 생각한다. 다만 의열단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서사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뜨거움이 발생하더라.

<밀정>은 <악마를 보았다> 이후로 각본가가 아닌 각색가로 이름을 올린 두 번째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화를 결심한 까닭이 궁금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의열단을 중심으로 읽게 됐다. 그래서 <암살>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스파이물의 느낌이 보다 강한 정도? 그런데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이정출(송강호)이 크게 들어왔다. 그래서 <암살>의 동어반복이 아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정출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나?
이정출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라는, 이미 정체성부터 복잡한 인물이다. 그 시대의 모순이 집약된 인물이라 느꼈고, 이정출을 이야기하는 건 결국 그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사실 이정출의 심경 변화가 개연성이 없다는 평을 보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인물 자체가 시대적 모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색주의자 특유의 모호함이 개연성 없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입장에선 대사나 상황을 비롯한 플롯으로 이정출의 선택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라는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지만 실존인물이 언급되거나 등장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팩션이라 할 수 있지만 허구라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이야기다.
의열단은 3.1 운동 이후인 1919년도에 창립됐고, 1920년 초반에는 가장 전위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중반부터 세력이 약화됐다. 일제가 무서워했던 단체였던 만큼 집중적으로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정>은 1923년도를 배경에 두고 있지만 정확한 시간 연대에 일치시켜 영화를 만들면 영화적 소재가 무력해질 수 있기 때문에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큰 덩어리 삼아 시간을 해체하고 재조합했다. 그래서 사실 각색 과정에서 "와해된 의열단을 재조직하는 걸 보면 정채산(이병헌)이 대단한 인물이다"라는 히가시(츠루미 신고)가의 대사가 있었는데 꼭 필요할 거 같진 않아서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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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시퀀스에서 이정출이 김장옥(박희순)에게 자수를 권유할 때 그가 공적을 쌓기 위해 회유한다기보단 진심을 다해 살아남으라고 호소하는 인상이라 이정출의 진짜 감정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진심인 거 같지만 그것이 김장옥의 편에 선 진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된 친구를 적으로 만나 눈 앞에서 자결하는 모습을 본 뒤 그의 인명부를 들여다 보는 이정출의 표정에선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 그것만으로도 이정출의 감정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됐다고 생각했고, 거기서부터 이정출의 내면에 겹겹이 쌓인 층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히가시를 통해서 김장옥과의 친구 관계가 환기되고, 의열단에 침투하기 위해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했는데 거기서도 김장옥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이정출이 의열단을 돕게 되는 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모순과 혼란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빚'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회색주의자로서의 경계는 여전한 거다. 그러니까 생존에 대한 철학을 진심으로 피력하지만 결국 변절자의 회유일 수밖에 없는, 이중성에 갇히는 셈이다. 결국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정출을 보자면 그가 면죄부를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정출은 결국 의열단의 조력자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가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처럼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극 초반에 이정출은 김장옥에게 "너는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냐?"고 묻는다. 그리고 극 말미에 김황섭(남문철)에게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소?"라고 묻는다. 결국 이정출은 끝까지 회색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남아있는 거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을 변화시킨 사람과의 약속을 완수하는 것뿐이지. 어떤 경험을 통해 마음을 편하게 둘 수 있는 쪽을 선택했고,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릴지 결정한 거다. 그렇게 정채산의 말처럼 '마음이 움직이는 게 가장 무서운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자신의 감정에 손상을 입힌 히가시에 대한 복수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탄을 터트리는 장면에서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음악인 'Bolero'를 사용했다. 대의적인 임무를 수행한다기보단 스스로를 위해 축배를 드는 이정출의 심리를 음악으로서 설명해주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의 단호한 신념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덕분에 그들의 희생이 상대적으로 숭고해지는 인상이기도 하고.
사실 희망은 누구나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내던져서 희망을 찾고 세상을 전진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나 자신부터 조국을 되찾겠다고 목숨을 던지고, 모진 고문을 견딜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더라. 결국 뒤늦게야 이 사람들이 굉장한 로맨티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들이 선택한 것에 스스로까지 내던질 수 있는 불나방인 거다. 그러니 결국 뜨거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밀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아무래도 이정출과 김우진과 정채산의 삼자대면 신이었다. 적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란 게 진심을 바탕에 둔 호소라는 점은 어떤 의미로는 너무 뜻밖이라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정채산이 김우진과 이정출의 이야기를 몰래 귀담아 듣다가 이정출을 사람으로서 만나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술은 남자들의 세계를 잇는 최선의 매개니까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이다. 그런 선택을 본 관객 입장에선 정채산이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신뢰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송강호와 이병헌의 카리스마와 그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는 공유의 존재감이 삼위일체를 이루니 인물들의 관계 변화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긴장감이 폭발할 법한 상황에서 오히려 가장 극적인 유머가 발생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처음으로 이정출을 의열단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신이란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굉장히 과감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 신의 목표는 세 사람 사이에 형성된 냉기가 급속도로 해빙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고도의 수싸움을 펼치는 장면이란 점을 이해시키고 그런 관계를 설득력 있게 납득시켜야 하지만 논리적인 방식으로 보단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세 사람이 자리한 그 공간이 따뜻하게 느껴지길 바랐다.

이병헌은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음에도 두 주연배우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실 <밀정>에서 마지막에 캐스팅된 배우가 이병헌이었다. 심지어 상해에서 촬영을 시작했을 때까지도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웃음) 불안하지 않았나?
굉장히 불안했다. 그래도 믿음이 있어서 기다렸는데 결국 그 믿음이 중요했던 것 같다. 정채산도 결국 이정출을 믿어서 성공하지 않았나.(웃음) 나 역시 믿고 기다린 덕분에 그 효력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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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엄태구)가 처음 등장해 일본어로 말을 할 땐 당연히 일본인 경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정출과 조선말로 대사를 하는 걸 보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인지 궁금해졌다. 사실 영화상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실 편집 과정에서 히가시와 하시모토의 대화 장면이 하나 삭제됐다. 히가시가 하시모토에게 이정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면서 "아, 자네도 조선인 출신이지?"라고 긁으니까 하시모토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부정하는 답변을 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의주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살았고, 자신은 완벽한 일본인이라는 식으로. 아무래도 그 장면이 삭제돼서 그의 출신 성분을 명확히 대변하는 신이 사라진 셈이다.

하시모토의 출신 성분을 아는 게 꼭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이라면 상대적으로 동일한 신분인 이정출이 친일파로서 정체성조차 얼마나 얕은가를 대비적으로 드러내는 역할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하시모토를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로 설정했다.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임에도 성질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의지와 신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차이가 이정출을 밀어내는 동력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하시모토 역을 맡은 배우 엄태구는 <밀정>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주로 과묵한 역할을 맡아온 배우였는데 <밀정>에서의 하시모토는 대사량이 상당한 캐릭터다. 그래서 그를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했다.
사실 엄태구는 내가 생각했던 하시모토의 이미지에 가까운 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봤을 때 나를 전율시키는 에너지가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온전한 기운 덩어리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그런 기운이 하시모토에게 더 적합해 보여서 결국 엄태구를 선택했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이 있더라. 한번은 촬영장 스튜디오 구석에서 감정에 몰입하면서 의식을 치르듯이 혼자 대사를 하는 모습을 멀리서 본 적이 있는데 진짜 배우를 만난 기분이었다.

엄태구를 만나기 이전에 구상했던 하시모토는 어떤 이미지였을까?
건장한 육체와 말끔한 인상을 가진 인물을 떠올렸는데 기존 배우로 예를 들자면 주지훈 같은 이미지였다. 상대적으로 엄태구는 마르고 빈약한 느낌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기이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예상하기 힘든 악질의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내가 연상했던 기존의 이미지는 너무 전형적인 것 아니었나 싶기도 하더라.

<밀정>은 배우 송강호와 함께한 네 번째 영화다. 연출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과 두 번째 연출작인 <반칙왕>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감독 김지운과 배우 송강호는 함께 성장한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한국영화가 활발해질 무렵에 함께 머리가 컸으니까. 사실 내가 연출한 전작들을 자주 보진 않지만 간혹 볼 기회가 생기면 저럴 때도 있었구나 싶긴 하다. 아무래도 그때는 눈높이와 역량의 차이가 더욱 컸기 때문에 훨씬 더 절망적이었을 거다.(웃음)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송강호라는 배우는 일관성 있는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결 같다. 프로로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지민이 연기한 연계순은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제 역량을 가장 잘 드러낸 여자 캐릭터란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
<밀정>은 기본적으로 두 남자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한 남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연계순은 두 남자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로 봤다. 처음에는 신인 배우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가 확장되면서 신뢰감을 줄만한 배우가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밀정>에서 압권이라 여기는 부분은 연계순의 기차역 액션 신이다. 기차역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연계순을 중심으로 흩어지는 모습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해지지만 흔들리지 않는 위엄이 느껴지는 동시에 맵시도 산다. 결국 그 장면에서의 연계순이 의열단 그 자체를 보여준다. 내겐 더없이 만족스러운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여성 캐릭터로서 대상화되고 있다는 인상이 남기도 했다.
사실 뒤늦게 반성한 지점이 있다. 기차에서 하시모토를 발견한 연계순이 옷을 풀어헤쳐 가슴골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우는 건 약국에서 하시모토를 마주쳤을 때의 단정한 차림새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다. 일종의 장르적 클리셰인데 뒤늦게 그것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에 갇힌 설정이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 성찰 없는 인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반성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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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의 의열단 단원들은 자기 신념을 뜨겁게 발화하고 웅변하는 인물들이다. 사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들의 인물들은 명확한 신념을 따르는 인물들이라기보단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 방침을 정하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밀정>은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영화 안에서 새로운 태도를 발견하게 된 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밀정> 이전까지 내가 영화를 대하던 태도는 '세상이 이렇게 흉측하고 힘들고 어두운데 뭐가 저렇게 밝고 즐겁니?'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어둡고, 끔찍하다 보니 영화에서까지 실패한 역사를 말하고 다루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다루는 인물의 태도까지 크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실패한 역사라 해도 그걸 딛고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밀정>과 관련은 없지만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을 겪게 되는 현실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전진해 왔다고 믿었던 세대로서 처음으로 시대가 퇴보한다는 기분을 느꼈을 때의 충격이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클로즈업 신이 상당히 많다.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이 <밀정>의 주요한 미장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표정의 서사로 읽혀지길 바란 영화였던 만큼 인물을 타이트하게 촬영한 신들이 많다. 인물의 표정을 통해 극의 무드가 전달되지 않으면 서사도 무너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작은 모니터로 볼 때는 완급조절이 잘 되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 힘들어서 후반작업으로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좀 더 뒤로 빼서 거리를 두고 찍기도 했다. 그래서 편집과정에서 컷의 사이즈를 조절해 표정을 좀 더 채운 부분들도 있다. 다행히도 배우들의 표정이 좋아서 의도를 잘 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본경찰에 의해 의열단원들이 하나씩 척살당하는 신이야말로 <밀정>에서 가장 뜨겁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인데 그 순간에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 'When You're Smiling'이 흐르면서 찬물을 쫙 끼얹듯 감정의 온도를 확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극후반부의 'Bolero' 역시 극적인 상황과 역설적인 감상을 준다는 점에서 유사한 장치적 역할을 하는 느낌이고.
일종의 온도 조절기 같은 역할이었다. 사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사진과 음악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 편인데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 'When You're Smiling'을 비롯해 <밀정>에서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영화를 제작하면서 수집했던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리고 모두 다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음악들이었다. 슬라브 무곡은 1900년도에 유행하던 음악이었고, 'Bolero'도 1920년대 초에 발표됐고, 스윙재즈도 192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193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감미로운 스윙재즈 넘버가 동시대 지구 반대편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이들에겐 향유할 수 없는 박탈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의열단이 척살당하는 신에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를 얹었을 때 비극성이 더욱 명징해진다고 느껴졌다. 이정출의 고문 신에서부터 넘버가 흐르기 시작해 경성에 잠입한 의열단이 소탕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데 만약 그 넘버가 없었다면 감정이 넘쳐서 신파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거다.

대부분의 스코어 넘버들은 짧고 간결한 음을 초시계처럼 빠르고 일정하게 반복함으로써 서서히 긴장감을 조성한다. 반면 컷의 호흡에는 대체로 여유가 있어서 컷 전환의 속도는 스코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긋한 인상이라 역설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컷의 긴박감보단 공기의 긴박감을 통해 감상을 조여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스몰 액팅'을 요구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표정을 주문했다. 그리고 마주앉은 상대방이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눈빛을 주고 받는 시선 처리 등을 보여주기 위해 컷의 호흡을 최대한 안배했다. 대신 음악을 통해 긴장감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음에 가까운 사운드를 내는 성질의 악기들을 활용한, 인더스트리얼한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외부에서 유입된 소음이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듯이, 그런 성질의 음악이 영화적 상황을 보다 몰입하도록 만들 테니까.

타이틀 시퀀스와 극의 최후반부를 제외하면 페이드 아웃을 통해 신을 전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신을 전환할 때조차 프레임 공백을 없애고자 애쓴 느낌마저 든다.
전통적으로 디졸브를 활용할 땐 이전 신의 긴장감을 해소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밀정>에서는 앞선 신의 긴장감을 다음 신까지 끌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옵티컬 디졸브보다 CG 디졸브를 많이 썼다. 예를 들면 김우진의 얼굴에서 정채산의 뒷모습으로 카메라가 패닝할 때 그 위로 이정출이 탄 기차 이미지가 밀고 들어오고, 이정출이 하시모토와 하일수가 나간 방 안의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상념에 잠길 때 그 뒤로 자동차 불빛이 쭉 들어온다. 이게 다 CG로 작업한 디졸브인데 이렇게 그림들이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긴장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전적인 느낌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성취감도 있었다.

열차 신은 <밀정>에서 최상의 스펙터클과 최고조의 긴장감을 제공하는 신이다. 그런데 원래 시나리오에선 없는 장면이었다고 들었다.
각색 전 시나리오에서의 열차는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싣고 가는 운송수단에 불과하다. 의열단원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 열차에서 내려 기생으로 변장해 인력거로 옮겨 탄다. 신의주의 부유층들이 기생들을 불러 연회를 열곤 해서 기생으로 변장하면 검문을 통과하는 게 용이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단체가 국내에 잠입할 때 활용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 지점에서 영화적 긴장감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열차를 운송수단 이상의 극적인 무대로 만들고 싶었고 각색을 통해 지금의 열차 신을 만들었다.

비좁은 열차의 제한된 동선을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전개되는 신을 설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잘하는 부분 중 하나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서 인물의 동선이 제한되는 열차에 모든 상황을 때려 부어서 두 인물의 감정선을 극대화시켰다. 김우진과 이정출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로 내달리는 열차가 예측하기 힘든 시대성을 대변하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사실상 영화의 하이라이트도, 주제도 다 거기 있다. 그 모든 것을 부어 넣고 가열시켜서 끓는 점이 됐을 때 튀어나오는 인물들의 형태를 통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열차 신으로 촬영된 분량은 40여분이지만 신의 절반 정도를 편집해 지금의 분량이 남았다.

그렇다면 감독판을 추가 개봉해도 좋겠다.
그러기엔 편집할 시간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인랑>을 미뤄왔는데 이젠 정말 빨리 해야만 한다.

오래 전부터 연출작으로 언급됐던 <인랑>이 드디어 <밀정>의 차기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사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하는 건 처음일 텐데 워낙 유명한 원작이니 부담될 것 같다.
그래서인지 너무 안 풀려서 힘들다.(웃음) <인랑>은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공유한 허무주의적인 정서로 점철된 세계관이라 원작의 무드를 최대한 살려서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원작을 대변하는 주요한 요소들만 남기고 완전히 뒤집어볼까 고민 중이다.

<인랑>에서 보존하고자 하는 주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강화복의 형태나 인랑이라는 비밀 스파이들의 암투 그리고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성 같은 것이다. 정말 뻔뻔하게 이것만 가지고 가볼까라는 고민도 있다. 사실 너무 오래 끌어온 프로젝트인데 이젠 정말 해야 한다. 지금 생각으론 내년 3~4월쯤 크랭크인에 들어갈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조급함이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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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장성용
<모닝 캄>을 비롯한 다양한 매거진에서 풍경과 인물 사진을 찍어 왔고, 현재는 색다른 콘셉트의 베이비 스튜디오 그린비(http://www.studiogreenbee.com)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_민용준
영화웹진 '무비스트'에서 영화기자로 밥벌이를 시작하며 'beyond'와 'ELLE KOREA' 에디터로 잡지를 만들고 기사를 쓰고 다양한 취재원을 만나 인터뷰를 해왔습니다. 현재에는 올레 TV <무비스타소셜클럽>의 배우 인터뷰 코너 '스타케치'와 KBS 라디오 월드 <생생코리아>의 '시네마토크'에 출연 중입니다. 주로 영화에 참견하고, 대중문화와 갖은 이슈에 종종 말과 글을 보탭니다. 한량의 삶을 추구하며 끊임 없이 놀고 먹으며 즐길 수 있는 노하우를 탐색해 왔으나 이번 생은 망했다는 결론을 얻고 나름대로 게으르게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