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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진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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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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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잊혀지네'
그것은 더 나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첫 출발은 상큼합니다. 당선이 확정되고 취임한 첫날 행보도 가벼웠습니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을 섬기겠다는 말과 야당들을 직접찾은 발걸음 말입니다. 그 후 보여준 4강 외교 행보 역시 믿음직스럽습니다. 인선 역시 아직은 일부 국민과 언론의 패거리 정치와 문화에 대한 불안을 상기시킬 정도는 아닙니다. 심지어 문재인 후보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언론조차 슬그머니 태도를 바꿨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나은 민주주의를 바란 사람의 하나로 기쁜 것은 '진보의 진화'를 목격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진보는 왠지 불안하고 무능하다는 인상을 상당수 국민들에게 심어줬습니다. 보수 진영과 언론의 악의적 공격 탓이 컸으나 빌미를 아예 제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노쇠한 민주 투사 출신 대통령은 임기말 전적으로 신뢰하는 소수 측근의 전횡을 방치했고, 젊고 개혁적인 승부사형 대통령은 뜻만 옳은 방향이라면 과정이나 결과야 어쨌든 상관 없다는 태도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후 보수 퇴행의 명분이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시행착오를 극복해야 합니다. 비록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딘 시점이긴 하나 그 가능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어떤 정권이라도 처음 그런 법입니다. 그러나 짧은 허니문 기간이 끝나고 나면, 적대적 언론은 물어 뜯기 시작하고 국민들은 찬동하고 나섭니다. 그래야 정권 교체에 반대했던 자신을 합리화하기가 편한 법입니다. 그때쯤이면 대통령의 사람들도 실수를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권력 핵심 일부가 자만에 빠져 오만으로 비칠 법한 실언을 할 것입니다. 두 번의 진보정권에는 이처럼 놀라운 패턴이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안정적인 첫 출발과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적 행태 때문에 희망이 한껏 고조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종말' 이라는 환상은 언제나 커다란 실망으로 끝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 민주주의가 궁극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후쿠야마의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심지어 국가 조차 항상 변화를 마치고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언제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보가 승리하고 정의가 넘쳐 흐른다는 판단은 한때의 환상일 따름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지난 보수 정권하에서 진보나 정의가 흔들리지 않고 온직선으로만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마저 목격 했습니다.

더욱이 진보의 미숙과 보수의 퇴행을 경험하는 동안 양진영에는 극단주의 발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태극기 집회가 보여준 비이성적인 행태나 이번 대선에서 막판 2번으로 쏠린 영남 지역의 불합리한 선택은 극단주의의 경계에선 우리 정치나 이념 지형을 잘 보여 줍니다. 안보라는 명분과 공포심리, 포퓰리즘이 결합할 때 미국이나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혹은 양진영의 극단주의가 흔들어 대면서 난파하는 배의 운명을 맞지 않을 거란 확신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출발부터 특정한 사람이나 진영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제도가 아닙니다. 실은 그 반대입니다. 현명한 초인(超人) 따위를 믿을 수 없기에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한 사람에 온전히 맡겨둘 수 없기에 다수의 의사를 중심으로 결정하고, 문제를 풀게 한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잊혀지네' 식의 인식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또 어느 진영이 어떤 실수를 하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총체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호한 존재입니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면서도, 찬성하는 후보에 표를 몰아준 지역민들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쉽게 규정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진보도 이점을 인정합니다.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더 나아가서 개조하려는 것은 진정한 진보가 아닙니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읽었던 러시아 대문호 체홉의 편지 한 구절이 요즘 제 심정을 대변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나를 단호하게 진보주의 또는 보수주의자 중 하나로 보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며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점진주의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수도승이나 냉소주의자도 아니다. 위선과 무지, 독재는 상인 가정이나 경찰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문학계, 그리고 젊은 세대에서도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그래서 난 경찰, 푸줏간 주인, 과학자, 작가 또는 젊은 세대를 특별히 편애하지 않는다. 나는 꼬리표와 라벨을 편견이라고 본다. 나의 성역은 인간의 몸, 건강, 지성, 재능, 영감, 사랑, 그리고 상상 할 수 있는 가장 절대적인 자유, 모든 형태의 폭력과 거짓으로 부터의 자유다.(제이미 홈스,<난센스> 중에서)"

바로 이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 사람을 중심으로 삼고 사랑하되 전적으로 사람을 믿고 사람에만 의존하지 않는 것, 미래와 진보에 대한 낙관 주의는 품되 진보가 저절로 진화할 수 없다는 비관론을 신봉 하는 것, 그것이 요즘 나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잃지 말아야 할 믿음이 아닐까요?

이여영 (주)월향 대표 yiyoyong11@iclou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