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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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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LD TRUMP
Mykola Lazarenko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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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에서 밀리면 망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1987년에 쓴 <거래의 기술>에 나오는 구절이다. 부동산 개발업자로서의 경험을 다룬 이 책은 지금도 트럼프를 이해하는 교과서다. 멕시코와의 국경협상, 중국과의 무역협상, 그리고 최근의 대북정책도 공통점이 있다. 엄포를 놓고 위기를 조성해서 상대의 혼을 뺀 다음 적정한 수준에서 실리를 챙기는, 다시 말해 의도적으로 혼돈을 조성해서 유리하게 거래하는 '전략적 혼돈' 전략이다.

이 책에는 3000만달러짜리 비행기를 500만달러로 후려쳐서 결국 800만달러로 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때처럼 북한을 후려치고 혼돈으로 몰아가, 적정한 시점에서 유리한 방식으로의 타협을 궁리할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를 사는 일과 외교협상은 다르다. 북한은 파산 위기에 몰린 비행기 판매자도 아니다. '부당하게 덤비는 상대는 거칠게 반격한다'는 생각을 상대도 하면, 적당한 타협이 어렵다. 부동산업과 외교관계가 다른 결정적 차이는 바로 혼돈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데니스 로드먼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트럼프의 <거래의 기술>을 선물했다. 북한은 자신들의 전략이 왜 트럼프 책에 쓰여 있는지 깜짝 놀랐을 것이다. '허세의 기술'은 북한도 자주 활용한다. 알고 보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바로 혼돈을 유도해서 이익을 챙기는 수법이다. 돈이 아주 많은 사람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동일한 기술을 사용한다. 우연은 아니다.

현재 북한이 트럼프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는 환경이 존재한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아주 여러번 전쟁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쉽게 겁먹지 않는다. 또한 북한은 미국이 아무리 엄포를 쏟아내도 전쟁을 할 수 없고, 중국과 러시아가 자신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한다. 한·미·일과 중·러의 대립구조가 바로 북한이 모험을 감행하는 전략적 환경이다.

물론 북한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혼돈의 통제 불가능성이다. 과거의 협상과 달리, 상대가 혼돈을 즐기는 트럼프다. 억지와 제재의 악순환이 장기화할 경우 한반도 질서는 예측 불가능해진다. 과연 북한이 적정 억지력을 넘어서 군비경쟁을 장기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례를 보면, 핵무기를 가져도 재래식 군비를 줄일 수 없다. 제한 분쟁에서 핵무기로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을 상대로 과거 소련 수준의 보복능력을 가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과연 과잉 억지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혼돈의 안개에서 빠져나와야 산다. 트럼프는 북한을 상대로 전략적 혼돈을 일으켰는데, 예상치도 않게 남한에서 이득을 챙길 수 있음을 알았다.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 겁을 먹고, 흔들면 흔들리니 마구 흔들어댄다. 이득이 생기는데 왜 혼돈을 거두겠는가?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도 겪을 만큼 겪었다. 겁을 먹고 혼돈에 편승해서 매달리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잃을 것은 많다. 북핵 문제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레이건의 말을 인용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의 소중함 말이다. 북한과 미국은 깨달아야 한다. '힘에 의한 평화'를 상징하던 레이건이 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었는지를. 바로 핵전쟁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핵 억지 상황에서 '힘에 의한 평화'는 언제나 우발적 충돌의 위험을 남긴다. '혼돈'의 경쟁에 맞설 유일한 무기는 바로 '평화'다. '평화를 만드는 자, 복이 있나니.'

* 이 글은 <한겨레>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