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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私傳] 빨간약을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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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커피가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바그다드 카페>나 <커피와 담배> 같은 영화. 이 두 작품은 이미 커피 영화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버킷 리스트>와 <카모메 식당>도 커피 영화 전선에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 여러분 머릿속에서도 뭔가 다른 영화가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커피는 은근히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와 잘 어울린다. 아니, 커피는 영화적이란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커피나 영화 모두 스토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영화 속에 커피는커녕 커피란 말조차도 나오지 않는데 알고 보면 본격 커피 영화가 있다. 응? 정말 그런 영화가 있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생각해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커피랑 전혀 상관없어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분명히 커피 영화다. 커피가 바꿔온 혁명의 인류사를 은유적으로 이야기한 거대한 메타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만큼 커피의 본질을 꿰뚫은 작품은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낮엔 컴퓨터 프로그래머, 밤엔 해커로 이중생활을 하던 앤더슨은 어느 날 모피어스와 트리니트리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네오'로 소환당한다. 소설 <토지>식으로 말하면 정말 자다가 봉창 뚜드린 상황이다.(실제로 영화 속에서 네오는 자고 있었다.) 심지어 모피어스는 세상은 컴퓨터(기계)가 지배하고 있으며 지금 인간들 눈에 보이는 것이나 향유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가 만든 정교한 가짜 이미지(매트릭스)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매트릭스를 지배하는 기계와 인간은 전쟁 중이고 이젠 네오 당신이 나서서 이 전쟁을 끝내 달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아 그렇구나! 그럼 제가 지구를 구할게요!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

못 믿는 네오에게 모피어스는 빨간약과 파란약 두 개를 주면서 선택하라고 한다. 빨간약을 먹으면 저너머 진짜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파란 쪽을 선택하면 그냥 이 세계에 남는 것이라면서. 바로 이 장면을 놓치면 안 된다. 커피에 대한 강렬한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빨간약은 커피를 상징한다. 빨간 열매로부터 나오는 바로 그 커피 말이다. 그리고 커피는 네오가 빨간약을 선택하여 참혹한 진짜 세상을 알게 된 것처럼 인류를 각성시켰다. 유럽의 시민혁명과 근대화가 커피와 커피하우스를 통해 촉발되었다는 많은 글들처럼 빨간약을 먹은 네오는 이제 기계(지배자)에 대항하는 반군이 되어 매트릭스 공간을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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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IMDB

이처럼 영화 <매트릭스>는 빨간약을 먹고 깨닫게 되는 네오를 통해 '커피를 통한 각성'의 중요성을 묘사했으며, 기계와 인간의 싸움을 통해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고 여겨졌던 기계 독점 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여준다. 기계는 결국 인간과 협상하기에 이른다.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보다 깔끔하게 커피의 본질을 정리한 영화가 있었던가.

얼마 전, 토니 스타크(영화 <아이언 맨>)란 별명을 얻고 있는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비디오 게임이며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그래픽이 아주 훌륭한, 정교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과 똑같은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테크놀로지는 가상현실과 기저 현실의 구분이 곧 사라질 정도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커피 마시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날 세상이 된 것이다. 자, 만국의 커피 네오들이여 단결하라!

덧) 워쇼스키 자매가 <매트릭스> 전에 만들었던 영화 <바운즈>를 보면 두 여성의 첫 만남에 커피가 등장한다. 중요한 건 커피를 마신 후 이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다. 눈여겨 볼 대목.

*원글은 커피앤컬처 웹진 '커피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