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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과와 '근대성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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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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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 전개된 헬조선 담론이 남겨놓은 강력한 자장 중 하나는 특히 비교적 젊은 세대들이 공통의 적으로 TK지역-60대 이상 "틀딱"(이 단어는 일베에서 발원하고 확산되었다)을 상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보다 두 배 이상 득표했다는 대구경북 지역 출구조사결과가 공개될 때, 60대 이상에서 홍준표 후보가 제1의 지지율을 기록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 이 '대구경북노인들'은 한국을 아직 전근대의 영역에 붙들어놓는 망국의 근원으로 지목당한다.

2000년대 후반이 김용민의 "20대 개새끼론"을 비롯해 "정치에 관심없는" "나약하고 무력한" 청년세대들을 '나라를 망치는 주범'으로 확정짓는 시기였다면, 놀랍게도 그로부터 채 10년이 지나기 전에 화살의 날끝이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우파정권의 변명불가능한 실책만의 소산이 아니며, 그동안 한국인들이 정치체의 핵심으로 간주해오던 가치 자체가 이동했음을 함축한다. 10년 전 보수적인 노년층과 386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중년층은 90년대 후반 학번부터의 20대들에게 (그 방향이 어느 쪽이든) "헌신"을 요구했다. "열정", "참여" 같은 것들은 그저 단순히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가 아니라,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에너지를 이끌어내고 그 에너지를 정치체 혹은 보다 큰 공동체에 쏟아붓는 "덕성의 인간"이 되도록 권장하는 사고체계의 파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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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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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 선거 연령별 출구조사 결과 © DAUM

2010년대 중반에 우리는 그와 같은 단어를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제한된 용법으로 사용한다. 10년 전과 같이 이러한 표현을 생각없이 던지는 이들은 "노오력"을 외치는 "미개한" 꼰대들로 비난 받는다. 예를 들어 막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반기문은 별 생각없이 이런 멘탈리티를 노출했고, 결과는 젊은 세대들의 냉소였다 - 그는 나약한 정치인이 아니라 그저 낡은 인간이라서 거부당했다. 이러한 차이가 많은 이들이 즉각적으로 떠올리듯 '해도 너무한 세태'의 결과물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우리가 개별 인격에게 요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 자체가 바뀌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제 무한한 헌신을, 그리고 헌신을 내면으로부터 뽑아내는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인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속한 정치체가, 그리고 정치체를 구성하는 인격들이 그 양상은 제각기 다를지언정 고유의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즉 헌신을 끌어내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이는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 더 "계산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대가는 계산을 통해 측정되어야 한다). 적은 대가에 더 많은 노동력을 뽑아내는 것, 공동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성과를 달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제 그저 착취를 넘어 비합리적·비이성적인 사고, 저열한 두뇌·성품의 산물로 간주된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기대하는 우리는, 한편으로 사람을 설명하는 모델로, 다른 한편으로 사람에게 요구되어야 하는 규범적 가치로 합리성을 설정하게 되었다(후자의 이유에서, "덕성" 자체가 사라졌다기보다는 그것이 합리성에 매우 근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설명력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규범적·기술적(descriptive) 모델의 변화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해온 가치응축개념 "근대적인 것"과 결합했다는 것이다(심지어 박사모조차 "근대"를 대놓고 거부할 수 없으며, 드문 예외는 좌파로부터 발원한 동아시아론자들 중의 급진파, 가령 "역사학자" 이병한 같은 이들뿐인데, 이들은 근대성과 함께 합리성 또한 포기한 소수로 간주되어 아직까지는 대체로 무시받고 있다). 이제 사회와 인간을 사고하면서 합리적인 모델을 우선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근대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왜 박사모가, 박근혜와 홍준표를 지지하는 이들이 젊은 세대들로부터 그토록 조롱받는가? 이것이 더 많은 젊은 세대들이 "진보적"이 되었다는 뜻인가? "진보"가 80-90년대식의 용법으로 쓰인다고 할 때, 젊은 세대는 결코 더 "진보적"이지 않다. 단지 보수·중도·진보에 걸쳐 더 많은 사람들이 서구 근대적 합리성을 당연한 표준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그러한 정치적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박사모 및 기타 지지자들을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존재, 합당한 판단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로 바라보게 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말이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에서, 나는 문재인 지지자 및 새로운 정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386 진보들 또한 이러한 변화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선에서 박근혜 지지자들이 패배했다는 것, 그리고 젊은 유권자들이 대체로 명백하게 박근혜와 그 후신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곧 후자가 "386적 가치"에 동의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난 수년간 치러진 세대론의 담론투쟁에서 노년층만 아니라 40-50대 386 또한 헬조선의 한 구성물로 간주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으며, 이 사실은 지난 10월부터 지금까지의 놀라운 정치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쉽게 망각될 수 없다. 386 및 기존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국정운영 및 사회 제반분야의 언행에서 그 합리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양상이 나타날 때마다, 비난의 칼 끝은 이제 그들 자신을 향할 것이다(그리고 체제의 합리화는 결코 개개인의 합리화의 합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비판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물론 그 합리성이, 근대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과연 우리 사회의 근본가치로서 근대성의 지배가 다음 5년 간에도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 [BeGray]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