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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양향자 상무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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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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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며 열린 눈물의 기자회견을 감동적으로 지켜봤습니다. 본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해 기업의 꽃이라는 임원 자리에까지 올라선 신화를 이뤘지만, 젊은이들에게 '나처럼 노력하면 된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다고 하신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언론도 저처럼 깊은 인상을 받았는가 봅니다. 인터뷰가 몇 차례 이어졌습니다. 입당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정당을 대표해 연설도 하시더군요.

그런데 걱정스러운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양 상무님은 성공한 삼성맨입니다. 상고 출신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임원에 올랐습니다. 회사생활 30년 동안 다크호스이던 삼성전자가 세계 1위 반도체기업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전남 화순군 쌍봉리 시골집의 셋째 딸은 그리도 원하던 대학 입학의 꿈을 원치 않게 접어야 했을 것입니다. 삼성전자 입사 뒤 사내대학에 진학하려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길이 막히기도 하셨지요.

어학을 공부하려고 해도 고졸자를 바라보는 샛눈에 시달리셨을 것이고, 아이를 낳고서는 곧 그만둘 사람처럼 취급하는 남성 직원들의 태도에 상처를 입으셨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견디고 버티느라 눈물이 켜켜이 쌓였으리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양 상무님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기업의 꽃'이라는 임원 자리에, 그것도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상무 자리에 오른 분입니다.

여기서 제 걱정이 시작됩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해 하신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잡히지 않는다. 기업하고 어떤 컨센서스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기업 임원들은 경제민주화가 기업 활동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방해된다고 느낀다." (<한겨레> 인터뷰 중)

'기업 임원들'은 아마도 삼성 임원들일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논의의 출발은 삼성 지배구조 문제였습니다. 복잡한 지배구조를 짜서 적은 지분으로 거대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자식에게 경영권을 상속한 삼성 총수 일가의 문제를 지적하며 시작된 게 경제민주화 논의입니다.

삼성 임원들이 이런 경제민주화가 기업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삼성전자 생산직 직원들의 백혈병 산재사망 사건에 대한 언급은 더 걱정입니다.

"회사 시에이치오(CHO·인사담당 최고책임자)가 '우리는 직업병에 대해선 유가족이 납득할 때까지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더라. 실제로 그런 노력을 충분히 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앞으로도 노력할 거라고 생각한다...지금 (삼성이) 하는 노력들이 유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삼성에서도 적절한 보상과 사과 있어야 한다." (<한겨레> 인터뷰 중)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스물한 살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은 2005년이었습니다. 황씨는 2007년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고 맙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한 탓이라고 여긴 유족들은 산업재해 보상신청을 합니다. 하지만 삼성 쪽은 반도체 공장과 백혈병 사이에는 연관이 없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산업재해 보상신청을 하는 다른 백혈병 발병 직원들이 생겨납니다. 산재 신청자도 늘어납니다. 사건은 점점 커지지만, 삼성은 끊임없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합니다. 유족 및 환자 쪽과의 대화도 거부합니다.

5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흐른 뒤, 2012년 11월이 되어서야 삼성전자는 대화 의지를 표명합니다.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던 때입니다.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핵심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 등 노동현안을 우선적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안철수 예비후보는 삼성전자 공장 근무 뒤 백혈병과 뇌종양을 얻은 한혜경씨를 직접 방문하고, 산재인정을 촉구합니다. 이미 삼성전자는 소송에서 여러 차례 진 뒤라 코너에 몰려 있었습니다.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 완패한 상태에서야 대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2014년 전직 대법관인 김지형 변호사가 이끈 독립적 조정위원회는 사과, 보상, 재발방지에 대한 조정권고안을 냅니다. 삼성, 유가족, 시민단체가 폭넓게 참여해 만든 위원회였습니다. 삼성은 이마저도 거부하고 개별 보상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재해예방대책'에 대해 합의합니다. 사과와 보상에 대해서는 아직 유족 전체와의 합의라 이뤄지지 않았으며, 유족 중 동의하는 이들에 대해서만 개별 보상을 하겠다는 게 삼성의 입장입니다.

어떻습니까. 백혈병 문제와 관련한 삼성의 노력은 충분했습니까? 물론 삼성 임원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족이라면, 시민이라면?

삼성의 대응은 법적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려 내놓은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임직원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기업의 위상에 걸맞은 사회책임경영(CSR)을 찾아보기 어려운 대응이었습니다. 어떤 방안도 선제적이지 않았으며 늘 방어적이었습니다.

ISO, UN글로벌콤팩트 등에서 제시하는 국제 사회책임경영 기준에서는 인권과 산업재해 대응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 비춰보면 낙제점입니다.

정치인의 일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첫째, 누군가를 대표해 사회를 이끌고 가는 일입니다. 둘째,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 제시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사회 문제를 오래 고민해 온 전문가들의 몫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양 상무님이 시작하려는 일은 누군가를 대표하는 일입니다.

양 상무님은 누구를 대표하는 분이신지요?

저도 삼성경제연구소에 몸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산업의 중요성, 반도체인의 자부심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알기 때문에 양 상무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입당 기자회견 중 흘린 눈물이 '반도체인으로서의 소회' 때문이라고 하신 설명도 이해했습니다. 고향을 중히 여기는 훌륭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대표하겠다고 나선 정치인 양향자가 가질 태도는 아닙니다.

삼성 임원의 생각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이미 너무 많습니다. 거기 한 명의 이름을 더 올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치인이 대표해야 할 사람들은 아직 대표되지 않은 수많은 시민들입니다. 청년이든 소상공인이든 비정규직이든 노인이든, 삼성전자 상무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삼성전자 상무가 아니라 삼성전자에 갓 입사한 생산라인의 고졸 사원들도 대표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백혈병에 걸렸던 직원들도 이들 중에 있습니다.

이들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삼성전자 상무들과 싸우고 이겨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삼성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그런 싸움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제작소가 최근에 했던 '누가 좋은 국회의원인가' 시민토론회의 한 대목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엄마와 지역 소상공인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다 얼마 전부터 동네 빵집을 운영하기 시작한 경력단절여성을 출마시키기로 했습니다.'

시민이 원하는 후보를 가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시민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대표할 준비, 싸울 준비가 되기 전까지 당신은 여전히 정치인 양향자가 아닙니다. 삼성전자 양향자 상무입니다. 삼성의 임원은 삼성을 대표할 수는 있으나 국민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시려거든, 삼성의 양향자가 아니라 국민의 양향자로 변화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