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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대선후보와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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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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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5일, 안철수 당시 대선후보는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려 투병 중인 한혜경씨를 방문했었다.

그 날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아래 기사를 접하고서다.

"삼성전자 1천억 기부...공익법인 만들어 백혈병 등 보상"

김지형 전 대법관이 이끄는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 발생한 백혈병 '등' 환자들에게 공익법인을 만들어 보상하라는 조정안을 만들었다는 소식이다.

나는 당시 캠프에서 정책기획을 맡고 있었다. 출마선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선 레이스가 막 시동 중이던 때였다. 사무실은 24시간 뜨거웠다. 하루하루 급박한 시간이 이어졌다.
당시 캠페인 기조는 '경제'와 '혁신'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사실 이 방문은 이례적이었다. 기조와 정확히 맞는 것도 아니고, 당장 지지율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및 LCD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가운데 백혈병 뇌종양 등의 중병을 얻은 이들이 산업재해 인정을 받느냐 아니냐는 당시까지만 해도 심각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삼성전자는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나마 반도체는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되고 여론도 노동자들에게 동정적인 방향이었지만, LCD 공장에서 일하던 이들의 문제는 그만큼 알려지지도 않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문제'로 이 사안을 인식하던 때였다. 그러던 차에 안 후보가 LCD공장에서 일하던 뇌종양 환자를 전격 방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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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5일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선 후보가 서울 중랑구 면목3동 녹생병원에서 한혜경 씨를 만나 면담한 뒤 함께 병실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 후보를 만난 한혜경씨는 눈물을 흘렸다.
뜻을 같이 하던 캠프의 많은 이들도 그날 뿌듯함에 눈물을 삼켰다.

그날 안철수 후보는 대변인실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나라가 품격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정말로 발전하기 위해서, 품격을 지니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보다도 사람을 정말로 중심에 놓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품격 있는 나라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또 국민들이 집에서 나와서 퇴근해서 집으로 올 때까지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생산성 향상에만 그렇게 투자하기보다는 이제는 노동자와 사람의 안전에 투자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바로 며칠 뒤 삼성전자 쪽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쪽과 대화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김지형 전 대법관 등이 나서 조정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조정안이 나온 것이다.

정치인은 법과 제도를 바꿔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그가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는 순간,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거대한 변화의 출발이 되기도, 사소한 전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치에서 메시지는 그 자체로 실천이다. 어쩌면 직업 정치인뿐 아니라 언론인 학자 사회운동가 연예인까지, 대중에게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렇다. 잘 만들어진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으로, '신념'으로 스며들면서,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확산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다.
이번 조정위의 조정안은 'LCD'와 '뇌종양'을 포함한다. 그 시점, 그 캠프에서 기획해 실행했던 그 일정과 메시지가 이 조정안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었다면, 선거운동 기간 중의 그 하루는 역사적 순간이다. 어쩌면 선거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나서거나, 물러서는 것보다도 더 역사적인 순간이다.

나는 삼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일이 종종 있다. 벼린 칼날같은 문장으로 채운 칼럼을 쓴 일도 있다. 하지만 한 때 몸담았던 이 기업에 대해 나는 아직 기대를 접지 못한다.
아직 내가 아는 양식있는 이들이 그 곳에 몸을 담고 있다. 사회공헌활동을 가장 먼저 내세웠던 재벌기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끼리가 딛는 한 걸음의 힘과 무게는 벼룩이 딛는 수만 걸음의 힘과 무게보다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면 그것이 한국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너무나 클 것이기 때문이다.

한혜경씨는 이 글을 쓰는 2015년 7월 현재까지도 재판에서 이기지 못해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삼성이 부디 이 조정안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