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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불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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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론이 대세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새누리당 및 새정치민주연합 강연에서 '한국 경제의 문제는 성장이 안 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분배가 안 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최근 <중앙일보> 칼럼에서 '재분배보다 분배가 먼저 개혁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묵직한 경제전문가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성장이냐 분배냐를 따지는 해묵은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실은 가계소득 성장률이 경제성장률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하위 임금소득자들의 실질임금이 제자리에 머무는 현상이 몇년째 이어지면서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진 방향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사회의 논의가 여기서 '불평등'에 대한 것으로 한 걸음 더 나가면 좋겠다. 지금 분배가 문제인 까닭은 단지 나누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나누어지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성장도 재분배도 위협받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분배 문제를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미래세대를 걱정한다. 치솟는 청년실업을 걱정하고 고시촌의 취업준비생 인파를 걱정한다. 그런데 공공기관, 공기업, 대기업에만 몰리고, 이런 곳에 취업되지 않으면 취업준비생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청년들의 선택에는 어느 정도의 합리성이 있다. 노동시장에서 같은 능력으로 같은 노력을 하면 비슷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이 깨어진 데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다.

한국 사회는 성 안 사람과 성 밖 사람으로 나뉜다. 한번 성 밖에서 시작하면 성 안 진입은 불가능하다.

같은 능력으로 같은 기여를 해도 대기업 소속이냐 중소기업 소속이냐에 따라 임금이 현저하게 다르다. 시험 한번 잘 봐서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이 되면 안정된 임금과 연금까지 보장받는데, 정부 일을 위탁받아 수행하는 비영리기관이나 사회적기업 임직원은 현장을 누비며 고생해도 저임금과 불안정성에 시달린다. 똑같이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투자자를 찾아다녀도, 대기업 다니다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창업한 사람은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한 분야 전문성을 아무리 갈고닦아도 대학교수 자리를 꿰차지 못한다면 낮은 강사료와 연구비를 견뎌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청년들이 안전한 성벽 안에 숨고 싶어하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불안한 성 안 사람들은 성벽을 점점 더 높게 치려고만 노력한다. 청년들을 걱정하던 이들이 슬그머니 정년연장 구호 뒤에 숨고, 상위 10% 소득자들까지 부자증세 구호 뒤에 숨어 고용안정만을 외치며,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을 탓하며 채용을 꺼린다. 괜찮은 직장에 진입조차 어려운 청년들은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문제는 불평등이다. 이중노동시장과 불평등한 보상체계를 바꾸는 일이 가장 먼저다. '성 안 사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진입이 불가능한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평등을 '똑같은 삶'이 아니라 '공평한 삶'으로 해석한다면, 지금 청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등 지향적인 세대일 수밖에 없다.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대부분 청년기 이전에 도시 생활을 경험하며,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으로 누구나 원하는 지식을 찾을 수 있는 세대다. 1960년대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이 20%대에 불과하며 도시와 농촌으로 여전히 나뉘어 있었다. 그때와 견주면 세대 내 지식 격차는 크게 줄었다.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는 한국 사회가 이 세대의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것 같다. 기여하는 이들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진 지위 때문에 기여와 상관없이 더 큰 보상을 받는 구조가 있다면 깨어져야 한다. 구성원이 신뢰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혁신도 성장도 어렵다. 불공평한 임금 격차를 줄이는 일은 중요한 첫걸음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