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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약속'이 그들을 자살로 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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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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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 '왜 가계소득은 GDP만큼 오르지 않을까'에서는 지난 20여년 동안 GDP는 성장하는데 가계소득은 그만큼 늘지 않는 문제의 원인을 살펴봤다. 지난 글에서는 일단 그 원인을 노동소득분배율의 부진에서 찾았다. 그 글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기업소득 비중이 높아지고 가계소득 비중이 낮아지는 데 그 원인이 있고, 그 이유는 다시 노동소득분배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너무 어려운가? 그럼 다시 한번 더 요약하자. 경제는 성장하는데 삶은 고된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의 과실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더 요약하자면, 우리가 힘든 이유는, 월급이 적어서다.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분석하는 것은 정책을 연구하는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일, 즉 우리 사회가 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해 비교하고 분석한 뒤 지금에 맞는 대안을 찾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관심사다. 정치와 정책이 바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이다.

분명 한국사회는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경제적으로 시장화와 세계화와 탈규제화를 중심으로 뻗어갔다. 즉 경제성장과 가계소득 사이 괴리가 생긴 그 20여년을 설명할 때, 정책적으로는 시장화와 세계화와 탈규제화를, 그리고 그 정책을 뒷받침하던 정치세력을 빼놓고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초에는 자본시장자유화가 시작됐고 주식시장에 외국인투자가 시작됐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3당합당이 일어났고, 이 정치세력은 세계화를 하나의 분명한 정책지향점으로 삼았다. 1994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드라이브가 그 결과물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펼친 1996년의 OECD 가입과, 1997년 구제금융 이후 김대중 정부의 노동시장 관련 정책들까지 모두 비슷한 흐름이었다. 해고는 쉬워졌고 비정규직 채용은 일반화됐다.

그 과정에서 대기업의 역할과 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1997년 IMF구제금융 사태 이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엄청난 성장을 구가했다. 저환율로 값싼 제품을 마음껏 팔았고 인력은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두 개의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100조원에 육박한다. 한국 정부의 1년 예산의 4분의 1이나 된다. 가계소득에 견줘 크게 높아진 기업소득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면, 일부분의 답을 이 현금이 보여준다.

기업은 왜 이렇게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을까?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다.
기업 스스로가 생존과 성장을 추구한다는 말은 사실 이론적으로 틀린 말이다. 과거 주류 경제학 이론이 맞다면 기업 스스로는 실체가 없는 조직이다. 기업에게 부과된 비용은 모두 다른 개인에게 전가되며, 기업이 벌어들이는 소득은 모두 다른 개인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기업의 생존과 성장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명제이며, 그 기업의 주주나 노동자 개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명제다.

하지만 기업은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한다. 물론 그 유기체의 꼭대기에서 지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그들은 재벌이라 불리기도 하고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하는 귀족노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어쨌든 그 유기체는 지금 자라나는 국부를 먹고 몸집을 불려 원래 이 땅의 주인들에게 좌절감과 박탈감을 주는 불가사리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종합하면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좀 더 커졌다. 일부 기업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정도가 너무 심하니 경제 전체적으로 불길한 조짐이 보인다. 가계소득 정체가 성장 정체로 이어질 수 있게 될 가능성이다. 임금 정체가 가계소득 부진으로 이어지고, 가계소득 부진이 가계부채 증가로 이어지고, 소득 부진과 부채 부담으로 가계가 소비를 줄이게 되고, 내수 소비가 정체되면서 서비스부문 성장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전체 경제성장이 정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득부진의 악순환이다.

어려운 이들이 더 어려워지고 자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 아예 성장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문제다. 이렇게 된다면 지금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기업들조차 어려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즉 기업이 돈을 벌면 사람들 주머니 안에 소득이 뿌려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돈을 쓰면서 경제에 윤활유가 뿌려지고 나라가 앞으로 전진한다. 삼성전자가 사상최대 이익을 낸다면 삼성전자 주주만큼 삼성전자 제품을 만드는 데 기여하거나 희생한 노동자, 소비자, 협력업체 등의 소득도 늘어야 한다.

아직도 어려운가? 다시 한번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
나라 경제가 성장해도 삶이 힘든 이유는, 월급이 적어서다.
낮은 월급은 결국 기업까지 힘들게 하고 나라 경제가 성장할 수 없게 발목을 잡게 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미국 인디언 청소년들의 자살률보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높다는 충격적 사실이었다. 그 내용은 앞의 글 '한국인은 문화적으로 자살을 선호하는가?'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 청소년들의 자살을 다룬 <워싱턴포스트>는 이들의 절망의 원인으로 '깨어진 약속'과 '희망 없는 미래'를 들었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도 이런 것들이 들어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때까지 입시지옥을 잘 참아내고 대학만 가면 광명의 길이 열린다고 믿었지만 그 약속은 깨어졌다. 대학생들은 다시 입사지옥으로 향한다. 대학 시절 청춘을 반납하고 영어공부와 학점따기에 매진하고 취직하면 자유의 몸이 된다고 믿었지만 그 약속은 깨어진다. 비정규직 처지라 늘 불안하고, 정규직에 진입해도 곧 정년을 맞는다는 사실에 불안하고, 직장을 벗어나면 나를 의지할 곳이 없다는 데 절망하고, 노인이 되면 병들고 가난에 찌든 비참한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희망 없는 미래의 공포에 시달린다.

자살률은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사회에 생긴 그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어쩌면 20여년 동안 한국의 정책이 이들을 자살로 몰아넣은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참담하다. 깨어진 약속을 되돌릴 수 있을까?

좀 더 심각한 질문을 해보자. 지금 한국사회는 20년 뒤 우리의 삶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약속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20년 뒤 한국의 자살률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