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허핑턴포스트 블로거의 분석과 의견이 담긴 생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원재 Headshot

페이스북이 기본소득을 줘야 한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FACEBOOK
NurPhoto via Getty Images
인쇄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페이스북은 왜 우리에게 기본소득을 지불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혁신 담당 편집자 존 손힐이 쓴 글이었다.

글을 쓴 계기가 된 것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의 말이었다. 저커버그는 2017년 5월 미국 하버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여기서 평등을 이루기 위해 우리 세대 나름의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커버그의 '기본소득' 제안을 엎어치다

그가 제시한 사회계약의 내용은 이렇다. 국내총생산(GDP) 같은 경제지표로 사회 진보를 측정해서는 안 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로 측정해야 한다. 여러 차례 직장을 바꾸는 사회에 대비해, 보육과 건강보험은 한 기업이 제공하는 복지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기술이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평생교육 확대에 관심 가져야 한다 등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주목한 것은 그중 한 대목이었다. 저커버그는 "새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완충장치를 주기 위해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아이디어를 탐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는 소득을 주는 제도인 보편적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다.

손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페이스북이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유는? 바로 '데이터' 때문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지금껏 여러 차례 세계적 화제가 되었던 아이디어다. 기술 변화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함으로써 임금을 받는 사회체제는 종말을 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새로운 인간의 역할에 맞는 새로운 소득 분배 방식이 필요해진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그 논리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두 가지 근본적 질문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소득을 제공해야 하는가? 둘째, 무슨 돈으로 그 소득을 지급할 것인가?

첫째 질문에 대한 대략의 정답은 '기술 변화에 맞는 새로운 인간의 역할 찾기'로 수렴된다. 기본소득은 비자발적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노동,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보람과 즐거움을 위한 일을 찾아가도록 하는 소득분배 체계라는 설명이다.

더 어려운 질문은 사실 두 번째다. 이것에 대해서도 몇 가지 논리는 있다. 토지 관련 세금을 매겨 이 재원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사실 토지는 누군가 노력해서 가치를 높이는 게 아니라, 따지면 누구의 것도 아닌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금융거래세를 재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금융거래로 얻은 이익은 원천적으로 불로소득이라는 시각이다.

손힐은 그 재원으로 '데이터'를 제안했다. 그 데이터로부터 수입을 얻는 페이스북이야말로 재원을 제공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정보·지식이 자본주의의 주요 생산요소

페이스북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전세계에 20억 명의 사용자(한 달 이내 사용 기준)가 있다. 사용자들은 서로 교류하며 끊임없이 데이터를 제공한다. 누가 누구의 친구인지, 누가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 결과, 페이스북은 한 분기에 10조원가량의 매출을 벌어들인다.

매출의 대부분이 광고에서 나온다. 사용자 데이터가 있기에 가능한 광고다. 결국 페이스북 매출의 상당 부분은 데이터에서 뽑아낸 것이다.

페이스북의 이익은 주주들에게 귀속된다. 데이터에서 얻은 이익을 투자자에게 전달하는 모양새다. 사용자가 쓴 글, 맺은 친구관계, 형성한 그룹, 좋아한 페이지가 이익의 원천이다. 손힐이 '페이스북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어차피 불특정 다수의 기여를 통해 얻은 이익이니 불특정 다수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게 맞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종류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곳이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다. 알래스카주는 그곳에서 나는 석유를 기반으로 '알래스카 영구 기금'을 조성하고, 이 기금의 수익을 1년 내내 거주한 주민들에게 나눠준다. 1982년부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연간 800~2천달러를 매년 지급하고 있다.

주인 없는 석유로부터 나온 가치를 모든 주민에게 나눠주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는 취지의 정책이다. 덕분에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소득분배가 균등한 주 가운데 하나가 됐다.

데이터가 21세기 원유와 같은 것이라면, 거기서 나온 수입은 미 알래스카주가 시행하듯 골고루 나눠주는 일이 옳다는 게 손힐의 시각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한 이야기다. 자본주의 자체를 돌아보면 더 그렇다. 자본주의는 토지·자본·노동 등 생산요소를 상품화해 각각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경제를 운영한다. 시장은 생산요소 각각에 일정 몫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동원한다. 토지에는 땅값과 임대료를, 자본에는 이자와 투자수익을, 노동에는 임금을 지급하며 생산체제 안으로 불러들인다.

여기에 '지식'이라는 새로운 생산요소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이 20세기 말쯤부터다. 앨빈 토플러는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어 '정보화 혁명'의 물결이 온다고 했다. 지식과 정보가 자본주의의 기반이 된다는 예측이었다. 피터 드러커는 '지식노동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지식이 노동의 핵심이며 생산의 주요 기반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두 20세기 말, 지식자본주의 초기부터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학자들이다.

그동안 우리는 물리적 자본뿐 아니라 무형의 '지식'이 자본주의의 주요 생산요소가 되는 점을 차차 인정해가면서도, 지식은 대체로 사람들 안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다보니 지식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성장도 분배도 교육 문제로 귀결되는 것으로 인식됐다.

여기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인터넷과 인공지능이다. 정보와 지식은 본격적으로 사람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대량의 정보를 저장해줄 뿐 아니라, 검색할 수도 있게 해준다. 인공지능은 정보를 스스로 분석하며 진화할 수 있게 됐다. 사람과 분리돼 사람을 뛰어넘는 지식의 등장은 그렇게 가능해졌다.

이런 환경에선 지식 생산 방식도 변화한다. 과거에는 사람이 정보를 처리하며 연구해서 지식을 생산하고, 그 지식은 교육을 통해 사람 두뇌 안에 넣어야 한다고 봤다. 이때 가치는 연구와 교육과정에서 나온다. 그 과정에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문명이 발전한다고 봤다.

석유 불평등에서 교훈 얻어야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에는 빅데이터가 스스로 생산요소가 된다. 지식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데이터로부터 나온다. 데이터는 수집·정리 과정을 통해 인공지능에 제공되고, 인공지능은 스스로 결론을 낸다. 연구나 교육이 아니라 데이터가 가치의 원천이 된다. 지식자본주의 초기에 교육과 연구·개발 등의 지식노동이 중요해졌던 것처럼, 이제 데이터 생산 노동이 중요해진다.

데이터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페이스북, 구글, 카카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산한다. 서로 연결하고, 서비스를 사용하고, 놀면서 생산한다.

그렇게 놀며 쉬며 집적된 지식이 석유 같은 거대한 가치의 원천이 된다. 데이터는 시추하고 가공하면 굉장한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된다. 자동차도 굴리고 냉장고도 돌리고 거대 유통망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진 물건도 쇼핑할 수 있게 해준다.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이 이를 가능케 한다. 데이터는 땅에 묻힌 석유와 비슷한 존재가 됐다.

사실 석유는 근대사회 부의 원천이면서 세계의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석유라는 에너지원이 없었다면 20세기 인류의 놀라운 경제성장은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석유가 없었다면 훨씬 더 비싸게 사용했을 것이다. 석유는 연료가 되고 전기가 되고 플라스틱이 되어 우리 일상을 완전히 휘감았다.

석유를 태워 나오는 탄소 탓에 기후변화와 지구의 생명 단축이 진행 중이다. 석유를 놓고 벌이는 국가 간 다툼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석유에서 발생한 가치의 상당 부분은 다국적 석유 재벌의 배를 불리고 산유국의 후진적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제대로 분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채 인류사에 등장한 가치의 원천은, 결국 피와 불평등을 부르는 괴물이 되어갔다. 알래스카처럼 공평하게 분배하며 문제를 해결한 경우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일부다.

데이터는 어떨까? 장담할 수 없다. 이미 미국과 중국의 몇몇 기업이 소셜미디어와 검색엔진의 데이터를 과점해가고 있다. 그곳에서 나오는 가치는 현실이 돼가고 있지만, 그 가치를 분배하는 시스템은 석유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가치는 누구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답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터와 석유는 다르다. 석유는 원래 거기 묻혀 있던 것이지만, 데이터는 누군가 일함으로써 만들어졌다. 고용계약을 맺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납품계약을 맺어 원료나 부품을 제공하는 협력업체의 움직임이 아니다. 자발적인 사용자들의 움직임이다. 임금도 대금도 받지 않는 이들이 움직이면서 21세기 새로운 부의 원천이 형성되고 있다. 새로운 분배 시스템을 만들 명분은 있는 셈이다.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20세기의 윤리는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놀이도 일이고 소비도 일이라는 인식이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영리활동과 비영리활동, 계약을 맺고 하는 노동과 자발적으로 하는 노동의 경계선은 희미해진다. 일과 삶의 균형 대신, 일과 삶의 일치를 지향할지도 모른다. 재산 소유권보다 시간 통제권이 더 중요한 인권으로 보호받아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계약 고민할 때

머나먼 길 같아 보인다. 하지만 변화는 어쩌면 날벼락처럼 닥칠 수도 있다. 산업혁명 이전에 발생한 '인클로저'(enclosure·울타리 치기)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농민들이 경작하던 토지에 갑자기 울타리가 쳐지고 소유주만 사용할 수 있다는 배타적 소유권이 선포됐다. 공유지(commons)는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혁명적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셈이다.

그 뒤 주식회사와 노동권 같은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핵심 요소가 자리잡고 사회가 안정되기까지는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렸다. 그 전까지는 모두에게 혼란과 고통인 나날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좀더 순탄하게 변화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사회계약을 고민할 때가 됐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