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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광화문, 분노한 시민들은 희망을 안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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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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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광화문에는 N개의 깃발이 올려졌다

지난 25일 밤 11시,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는 제주도의 한 병원 입원실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며칠 전 교통사고로 입원했지만 작업을 늦출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여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을 교육하는 기업 대표이지만 오늘은 다른 사명을 띠고 금요일 밤을 보내야 했다. 사회적기업가, 비영리조직 활동가, 기업 사회공헌활동 담당자 등이 모여 며칠 전부터 준비 중인 '사회혁신가 N명의 시국선언문' 마무리 작업을 맡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운 채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 단체메시지방을 지켜보다가, 토론이 정리되면 다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수정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 시국선언은 전국에서 온라인으로 모인 사회혁신가 200여명이 공동작성하기로 했다. 초안도 6명이 같이 썼다. 수백 개의 의견을 조정해야 했다. 하지만 단 한 차례만 직접 만났다.

공동작업자들은 온라인 토론플랫폼 '빠띠'에 공개한 초안에 댓글과 수정제안을 남겼다. 수정은 온라인 문서공동작업 플랫폼인 '구글독스'에서 이뤄졌다. 최종 편집자인 이 대표가 침대에서 작업을 마무리하면, 사회혁신가들로서는 '역사적인' 시국선언문이 완성될 수 있었다.

그 시간, 박혜민 에스오피오오엔지 매니저는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 알람을 받고는 그 전화로 바로 문서수정을 시작했다. 그 문서는 김미진 위즈돔 대표가 제주도에서 행사를 마무리한 뒤 문서공동작업 플랫폼 구글독스에서 작성한 시국선언 보도자료였다. 홍진아 아쇼카한국 매니저는 서울 합정동에서 그 수정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의견을 전달했다. 이들은 흩어져 있었지만 모여 있었다.

지난 26일, 서울 광화문에 150만명이 모이기 몇 시간 전에 이들의 시국선언문은 완성되어 배포됐다. 시국선언에 서명한 500여명의 사회혁신가들은 광화문으로, 전국 각지로, 자신의 온라인 공간으로 흩어졌다.

광화문에서 행진이 마무리되던 즈음, 이들 중 몇몇은 서울시청 근처 한 맥주집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누구는 문화예술인을 돕기 위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었다. 누구는 운영하고 있는 족발집을 소외된 이들을 돕는 사회적기업으로 변신시키고 있었다. 누구는 기업 사회공헌활동을 돕는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각자 마음 속에 넣어둔 사회 변화의 꿈을, 자기만의 깃발을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는 참석자 수만큼의 깃발이 올려졌다. 이들은 건배를 하며 조금은 어색한 말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흩어진 '나'가 모여 '우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날 광장에 나왔던 모두가 그랬다. 흩어져 간직하던 자기만의 깃발을 들고 나왔다. 광장은 서로의 깃발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26일 오후 2시, 첫눈 내리던 광화문에는 이미 다양한 모임이 수많은 형태로 열리고 있었다.

온라인게임 '오버워치' 동호인 커뮤니티인 '전국디바협회' 회원들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하늘에서 하야가 빗발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게임 속 캐릭터의 대사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친다"를 패러디한 구호였다.

정치벤처 '와글'은 참석자들에게 빈 피켓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참석자들이 각자 자기만의 손피켓을 만들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도록 돕겠다는 취지였다.

인터넷 여성커뮤니티 '82쿡' 회원들은 광장 한 쪽 이순신 동상 앞에서 집회 참석자들에게 커피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이기고 더 버티도록 돕기 위해서다.

세월호 천막에서는 허무하게 스러져간 목숨을 추모하는 이야기가 펼쳐졌고, 세종대로 사거리 버스정류장 앞에서는 경제전문가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장과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경제 현안 이야기를 펼치는 길거리 공개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후 4시, 행진이 시작되자 더 다양한 깃발들이 등장했다.

고등학생 신홍기(16)씨의 깃발은 트럼펫이었다. 사회적기업 '에듀케스트라'의 수강생 네 명이 팀을 이뤄 연주복을 차려입고, 행진하는 사람들 중간에서 발맞춰 걸으며 트럼펫 연주를 이어갔다.

농민의 깃발은 황소였다. 구호를 써붙인 황소는 천천히 청와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뮤지컬 배우들의 깃발은 노래였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에서 청와대 쪽을 향했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라고 이어지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주제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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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과생존원정대 페이스북

문생원(필명. 27), 정채리(26)씨의 깃발은 웹툰이었다. 페이스북 웹툰 '문과생존원정대'를 연재하는 이들은 문과생들의 괴로움을 웹툰으로 표현한 스티커를 집회 참석자들에게 배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홀로선 나'들이 모인 '우리'였다. 흩어져 간직하고 있던 자기만의 목소리를 광장으로 가지고 나와 펼쳐놓은 경연장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이미 하고 있었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은 저녁 6시, 본 집회가 시작되자 하나로 모였다. 촛불을 들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던 150만 참석자는, 깜짝 등장한 가수 양희은의 노래를 한 목소리로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 나갈 길/멀고 험해도/깨치고 나아가/끝내 이기리라.'

이들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을까?

모두는 공적 의사결정과정을 완전히 깨뜨린 박근혜 대통령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분노는 박 대통령을 넘어서서 한국사회 구조에 다다르고 있었다.

'문과생존원정대' 깃발을 든 문생원(27)씨는 공정성이 깨진 한국사회에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 기득권층은 그래도 충분히 노력해서 그 기득권을 얻게 됐다고 믿고 있었죠. 편법과 인맥으로 권력을 휘두른 이번 사태를 보면서, 그 믿음이 완전히 깨어졌어요. 청년들에게 노력하라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정직하게 노력한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게 드러났으니까요."

취업 못하는 문과 대학 졸업생들은 스스로 잘못된 선택과 부족한 노력을 탓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통령을 부릴 수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인맥과 돈이 모자랐을 뿐이다. 그걸 깨닫고는 한국사회에 대해 화가 났다. 문씨는 그래서 깃발을 들었다.

그에게 분노의 근원은 '깨어진 약속'이다.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를 정확히 보여준다.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박정희 시대부터 진행된 하나의 발전 사이클을 완성했다. 의도한 대로 하나의 발전모델을 완성한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시작은 독재와 계획과 관치가 조합된 고속성장이었다. 국가는 원조 등 다양한 형식으로 끌어온 돈을 재벌에게 임의로 할당해줬다. 재벌은 국가의 명령을 받아 사업을 추진하고, 반대급부로 국가의 보호 속에서 독점을 양해받아 성장했다. 이 구조에 덧붙여, 댓가로 오가던 검은 돈을 가리켜 우리는 '정경유착'이라 부른다.

그 구조는 1990년대 이후 한 단계 도약한다. 다음 단계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얻는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는 죄악시되고 국가의 계획과 명령은 사라진다. 대기업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던 재벌로 출발했지만 글로벌기업으로 홀로 서야 하는 시기를 맞는다. '경쟁력'이 시대의 화두가 된다. 정경유착과 명령의 논리는 이윤극대화의 논리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경제는 하나의 발전사이클을 완성한다. 보호와 유착과 독점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뒤, 시장 논리를 접목시켜 그 경쟁력을 펼치고 확산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과 노동자들의 임금은 희생되어야 했다. 대신 시민들에게 국가는 성공의 규칙을 약속했다. '열심히 공부해라. 그러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취업하면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다. 열심히 일하면 오래 직장생활을 할 수 있고, 낸 빚을 다 갚고 자산 소유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노후도 안전하다. 내집마련한 직장인, 그게 한국의 중산층이고 시민이다.'

문씨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의 약속'이다. 당연히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은 그래도 꽤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 구조는 이미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직장 갈 수 없고, 열심히 일해도 오래 직장생활 할 수 없다.

자본없이 창업하려면 자영업자가 되는데, 자영업자는 한국경제에서 몰락하는 계층이다. 이들의 소득이 국민소득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여년 전에 견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내집마련은 어느 경우에도 어렵다. 노인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중산층의 꿈, 시민의 꿈은 무너졌다. 물려받을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약속은 완전히 깨어졌다. 이번 사태는 그 사실을 최종확인해줬다. 약속을 굳게 믿고 노력하던 청년들이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씨도 그들 중에 포함됐다.

문씨 뿐 아니라 참석한 시민들은 각기 자신의 분노를 소리높여 외쳤다.

재벌 대기업은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대통령은 거대한 부정부패 드라마의 배우일 뿐이고, 재벌 대기업들이 이를 지휘하는 제작진일지도 모른다.

'씽씽쿱' 깃발을 들고 나온 주영훈(39) 수원자동차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은 '1% 대기업의 기득권'에 분노하고 있었다. 김승일(40) '시장과사람들' 대표는 대기업과 그들에게 휘둘리는 정부에 분노했다. 성실하게 일하는 전통시장 상인들이 이번 사태에서 최고 권력자들과 수백억 수천억원의 거래를 일삼는 대기업들의 행태를 목격하며 허탈해졌던 것은 당연하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이런 사태를 미리 견제하지 못한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이었다. 조용히 동조한 관료집단도 분노의 표적이었다.

분노의 대상을 모두 뭉뚱그리면 무엇이 될까. '72년 체제'이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1972년을 "정치적으로는 유신,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정책, 조세 및 복지정책에서는 소득세와 기업 부담을 줄이고 간접세에 의존하는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도입된" 시기로 규정한다. 1987년 민주화로 대통령 직선제 등 형식적 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된 뒤에도 이 골격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복종과 특혜'보다는 '자유와 공정한 성과'를 지향한다. 하나의 깃발이 아니라, 'N개의 깃발'을 포용하는 사회를 원한다.

경제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한 줄로 서서 달리는 체제는 이 광장의 시민들과 맞지 않는다. 광장의 시민들은 더 이상, 몇몇 재벌 대기업들만 키우면 낙수효과가 모두에게 올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선출된 정치인들과 언론과 지식인의 권력 운용 및 견제 기능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들의 꿈을 담으려면, 1972년 체제를 넘어서는 역동적 경제 구조와, 1987년 민주화를 넘어서는 민주주의가 동시에 필요하다.

집회가 끝난 뒤, 그들은 다같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했다. 밤 11시가 되기 전 대부분은 흩어졌다. 각자의 깃발을 들고, 각자의 분노를 여전히 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잔치는 끝났다.

분노도 깃발도 이미 이들 안에 있던 것들이다. 이들은 무엇을 새로 얻게 됐을까?

희망이다.

"대통령이 바뀌면 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믿으세요?"

낮에는 한 기업의 신입사원이고 밤에는 그림작가로 활동하는 정채리(26)씨는 이렇게 답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희망이 생겼어요. 올바르지 않은 일에 대해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이 나라가 꼭 헬조선인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사회를 긍정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소셜벤처 '삼천원' 공동대표 김민식씨는 이렇게 답한다. "한국 사람들이 결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변화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들은 26일 광화문을 계기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새롭게 시작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여행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혁신'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흩어졌지만 흩어진 게 아니다.

사회혁신가들이 함께 작성한 시국선언의 다른 이름은 '시작선언'이다. 이들은 '대통령 퇴진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함께 만들자'는 말로 선언문을 시작했다.

이날 서울광장 정면의 서울도서관 대형현수막에는 가수 전인권의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의 마지막 구절이 쓰여 있었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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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꿈새김판 시안. © 서울시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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