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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졌을 때' 필요한 집단지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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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영업대리점에서 일하는 정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터널이 무너져 갇히게 됩니다. 그를 구조하기 위해 사고대책반이 꾸려지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부실공사와 언론의 자극적 보도, 인명구조가 경제논리에 의해 재단되는 현실 등 온갖 부조리 속에서 제대로된 구조는 요원해 보입니다. 이 내용은 지난 8월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터널>의 줄거리로, 잇따른 대형재난과 위기상황에서 늑장대응과 부적절한 접근으로 문제를 악화시키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풍자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지난 9월 12일 리히터 규모 5.1, 5.8이라는 강력한 지진이 두 차례나 발생했지만 국민안전처의 늑장대응으로 "이번에도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많은 비판이 일었죠. 이런 엉터리 재난 대처는 2011년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를 떠오르게 합니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는 피해 상황에 관한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고 TV보도에서는 방사능 누출 수치가 실제와 다르게 보도되기도 했죠. 이는 책임회피와 축소를 위한 권력기관의 전형적인 은폐 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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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2시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2리에서 주민 손일도(83)씨가 지난밤 지진으로 금이 간 자신의 집 외벽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한겨레

가장 많은 자원과 정보를 가진 국가가 잘못된 정보 제공이나 늑장 대응으로 추가 피해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경주 지진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살펴보면 그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더디고 복잡한 행정처리, 둘째는 정보공개의 불투명성, 셋째는 일방향적 의사소통입니다.

예컨대 지난 경주 지진 발생 당시, 상급자와 관계기관의 중복승인을 거쳐야하는 복잡한 행정처리 때문에 지진이 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국민안전청의 재난 경보 문자메시지가 발송되었습니다. 또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방사능 누출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아 추가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의사소통의 양상이 상급자에서 하급자로, 국가기관을 통해서 민간으로 이어지는 '일방향 의사소통'의 양상이 나타납니다. 결과적으로 두 사례에서 나타난 일부 추가피해는 적절한 대응으로 막을 수도 있었던 '인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국가가 재난이나 위기상황에서 적절한 대응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집단지성을 통해 국가기관과 공공행정의 비효율성과 불투명성 그리고 일방향성을 보완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자원과 기술을 바탕으로 추가 피해를 막고 앞으로 발생할 위기 상황에 대한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세이프 캐스트(Safecast), 빠르고 느슨한 커뮤니티

"일본 정부는 아무 것도 발표하지 않았고, 상황은 암흑과 같았죠.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피터 프랑켄(Pieter Franken), 세이프캐스트 공동설립자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 및 관련기구는 추가 피해를 막을 방사능 누출 관련 정보의 신속한 수집과 공유에 실패했습니다. 발전소 운영을 맡았던 동경전력은 물론 정부 부처, 국제 수준의 감독기관인 국제원자력기구 모두 제대로 된 정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민간 차원에서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있던 측정 정보도 도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던 데다가 측정 방식이나 기준이 서로 달라 이를 표준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IT관련 영역에서 교류해오던 션 보너(Sean Bonner)와 피터 프랑켄(Pieter Franken) 그리고 조이 이토(Joi ito)는 이러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세 사람은 표준화된 측정방식으로 동일본 지진 이후 일본 지역의 방사능 누출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고,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계획에 동의하여 합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지진 발생 1주일 만에 세이프캐스트(Safecast)라는 자발적 조직이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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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잼의 방사능을 측정하고 있다 /safecast

세이프캐스트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방사능 측정기를 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고 이후 전세계적으로 측정기의 재고가 부족했죠. 이를 논의하기 위해 4월 17일 도쿄에서 전문가들의 그룹 미팅이 열렸습니다. 하드웨어 전문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과학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등이 참여한 미팅 결과 세이프캐스트가 직접 새로운 측정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합니다.

세이프캐스트의 기민한 상황대응과 의사결정은 독특한 조직 구조 덕분이었습니다. 세이프캐스트는 오픈소스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접 소통형 참여 구조'(ad-hoc voluntary structure)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애드 혹 네트워크(ad-hoc network)'는 기지국이나 중앙통신망을 거치지 않고 사용자간의 직접적인 연결망을 가리키는데요, 이 개념에서 차용한 '직접 소통형 참여구조'는 어떤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중앙 단위를 만들지 않고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기반한 개방형 구조를 가리킵니다. 즉 세이프캐스트의 목표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만큼 참여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놓은 것이죠.

마찬가지 맥락에서 공동 설립자인 조이 이토는 공동작업으로 탄생한 세이프캐스트의 결과물에 대해 '저작권 및 소유권 없음(No Right Reserved)'을 명시했습니다. 이는 세이프캐스트가 제공하는 정보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세이프캐스트를 만들고 개선해나가는 작업에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느슨한 연결을 통해 협업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그 결과로 방사능 측정기의 디자인은 MIT 공학자가 담당하고, 제작은 일본의 IT커뮤니티인 도쿄 해커스페이스(Tokyo Hackerspace)가 진행하는 식으로 규모와 성격은 물론 소재지도 전혀 다른 개인과 그룹간의 협업이 원활히 이뤄졌습니다.

모든 거리를 측정하라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의 데이터를 원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도시의 '평균'적 데이터만을 공개했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도심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온 거리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거리의 방사선을 재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피터 프랑켄(Pieter Franken)

세이프캐스트가 개발한 방사능 측정기의 이름은 '가이거 카운터(Geiger counter)'로, 디지털 카메라만한 크기(12cm*8cm)에 GPS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가이거 카운터를 자동차에 부착하고 운전을 하면 자동적으로 이동한 구역의 방사능을 측정해 내장된 SD카드에 저장됩니다. 여러 사용자가 수집한 이 정보를 세이프캐스트 사이트에 올리면 방사능 누출 정도를 나타내는 지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지도는 새로운 정보가 올라올 때마다 끊임없이 갱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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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캐스트 타일맵 웹페이지 (http://safecast.org/tilemap/)

2016년 7월 기준으로 세이프캐스트에 올라온 측정 정보는 5000만 건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유사 이래 수집된 방사능 측정 정보보다 많은 수치입니다. 공동창립자인 피터 프랑켄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모든 지역을 적어도 한 번씩 측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지도는 웹브라우저와 스마트폰 앱을 통해 볼 수 있고, 일본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측정정보를 제공합니다.

지진희 알림, 유희적 집단지성의 힘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우선 안타까움을 느낀다. 더 나은 해결책이 나오길 바란다"
-지진희 알림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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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희 알림 텔레그램 알림방 (https://telegram.me/jijinhee_noti)

이어 소개할 사례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지진희 알림'이라는 이름의 지진 경보 채널입니다. 지진 조기 경보는 지진 발생 시 상황을 최단 시간에 알려 고속철도를 멈추게 하거나 가스공급을 자동차단하는 등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민안전처는 경주 지진이 처음 발생한 날 긴급재난문자를 늑장 발송했을뿐 아니라, 9월 19일 리히터 규모 4.5의 여진이 일어났을 때에도 12분이 지난 후에야 이를 알려 사람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이에 '이프로부족'이라는 별명을 사용하는 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발벗고 나섰습니다. '이프로부족'은 여진이 발생한 19일 저녁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지진 나면 텔레그램으로 알림 받기'라는 게시글을 통해 자신이 개설한 지진 경보 채널 '지진희 알림'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지진이 나면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있는 탤런트 '지진희' 갤러리에 이용자들이 집중적으로 글을 올린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지진희 갤러리를 30초마다 검사해서 1분 안에 글 20개가 올라오면 즉시 텔레그램으로 알림을 보내는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텔레그램 메신저를 설치하고 가입 링크를 클릭하면 메시지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유희적 요소와 실질적인 지진 경보 기능을 두루 갖춘 이 시스템의 존재는 온라인 커뮤니티는 물론 언론을 통해서 빠르게 확산되어 채널 가입자 4만 8천여 명, 알림 최고 조회 수는 12만 건을 넘어섰습니다. 이 지진희 알림은 9월 21일 오전 11시 53분경 경주 인근에서 규모 3.5의 여진이 다시 발생했을 때, 기상청이 운영하는 트위터보다 3분 빨리 지진을 알렸습니다.

모바일 구조대Mobile-retter

응급 상황 발생시 초기 5분의 응급 처치가 생사를 가른다고 합니다. 특히 심정지 환자는 3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면 소생률이 75%나 되지만 5분이 지나면 25% 아래로 떨어집니다. 응급처치가 늦어지면 소생률만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호흡이 돌아온다 해도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독일의 응급실 의사였던 랄프 스트롭(Ralf Strop)은 빠른 응급처치를 놓친 안타까운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는 응급처치가 필요한 환자들이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모바일 구조대(Mobile-retter)'라는 이름의 조직과 같은 이름의 앱을 탄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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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구조대(Mobile-retter) 공식 홈페이지 (http://www.mobile-retter.de/)

모바일구조대는 환자 발생 시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호출하는 서비스를 수행합니다. 응급처치가 가능한 구조원의 위치를 GPS로 상시 추적해, 경찰이나 병원 등에 구조요청이 왔을 때 모바일구조대 앱이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구조원에게 알람을 보내게 됩니다. 모바일구조대는 환자의 생사가 갈리는 '골든 타임'에 응급 처치를 받을 확률을 높이고, 그로 인한 피해와 비용을 줄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기존 응급 의료 프로세스를 바꾸지 않고도 이를 성공적으로 보완하고 강화한 것이죠.

놀라운 사실은 모바일구조대에 등록된 '구조원'이 특별한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바일구조대의 응급 구조원은 자격을 갖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됩니다. 의료 및 구조 활동을 전담하는 전업 의료인이나 전문구조대원뿐 아니라 DLRG(독일응급구호자원봉사단), THW(구호기관) 단원 등 응급구조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조원으로 등록할 수 있습니다.

모바일구조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3년 모바일구조대가 설립된 이래로 모바일구조대의 응급구조 훈련을 수료한 사람은 700명입니다. 이들을 포함해 모바일구조대가 접수한 응급 상황은 1000건이며, 650건이 성공적인 응급구조 수행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국내의 경우 서울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119 호출 시 응급차가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5분을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도착 소요 시간이 가장 긴 지역은 13분 17초까지 걸렸습니다. 심각한 출혈로 인한 쇼크나 심장마비 환자가 발생했을 때 적절한 응급처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모바일구조대와 같은 즉각적 응급구조 호출서비스의 도입이 시급해 보입니다.

위기와 재난에서 필요한 것은 국가와 시민의 '협업 구조'

이처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대안들의 궁극적 형태는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 이러한 솔루션들이 국가적으로 채택되어, 대안이 아닌 상식의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활용되는 것일 겁니다. 즉,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를 즉각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하고, 다른 조직에서 사용 가능하도록 공유하며, 일방향이 아닌 참여형으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형 지진, 원전 파괴와 같은 국가적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가기관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수많은 정보와 자원을 종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통로이니까요.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가기관의 오류와 문제점을 보완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개방적인 참여구조도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언제 '터널'에 갇힐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 아닌, '터널'에 갇힌 이를 구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발벗고 나설 수 있는 안전망을 갖춘 사회, 모두의 안전과 생명이 상식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는 열린 참여와 정보 공유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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