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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냥이'를 위한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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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에서는 길냥이 팔자가 상팔자 © 2015 Amigo ñao se compra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새 헌법에는 '길냥이권을 보장하라'는 조항이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한 시민이 '동물들도 존엄성과 지각이 있는 생명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며 헌법 조항을 만들고 정부에 제안했기 때문인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나라와 멕시코시티, '같은 개헌 다른 내용'

20대 국회의 개헌 논의가 뜨겁습니다. 국회의원 300명 중 80%가 넘는 250명이 이미 개헌에 찬성한다고 밝혔죠. 논의의 중심은 권력 구조의 개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 국회의원은 "포괄적으로 개헌을 논의하면 시간만 끌다 끝날 수 있다"며 권력 구조 이상으로 개헌 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조차 비판했죠.

최고법인 헌법을 바꾸는 일이 권력 구조의 재편으로만 축소해도 되는 걸까요? 이원집정부제니, 의원내각제니 자기 정파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국회의원에게만 맡긴다는 것은 더더욱 불안하기만 합니다. 집권에만 집중하는 그들에게 민의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죠.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도 지난 1월 연방 구역에서 주(州)로 승격되며 헌법을 새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멕시코시티의 새 헌법은 우리가 '헌법'하면 떠올리는 엄숙한 내용과 다른 '파격적인' 내용들이 눈에 띕니다. 동물 보호, 출산 휴가 확대, 공직자 재산 공개 등이 새 헌법에 제안되었기 때문인데요. 소수의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평범한 시민들이 온라인을 통해 헌법을 쓴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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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org에 '정치인에 대한 불합리한 혜택을 중단하라'는 청원에 약 5만 여 명이 서명했습니다


기본권, 참정권 그리고... 길냥이권?

멕시코시티는 세계 최대 온라인 청원 플랫폼 Change.org에서 헌법 초안에 담길 내용을 시민들로부터 공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헌법 내용이 어렵거나 낯설지 않습니다.

현재 가장 많은 서명을 받은 청원은 '공직자들의 납세, 재산, 이해관계의 내역을 공개'하도록 하는 것으로 6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서명했습니다. 청원의 제안자인 알레한드로 오르테가(Alejandro Ortega)는 "학교, 병원 등을 세우는 데 쓰일 수 있는 공적 자원이 부패나 실정으로 낭비되고 있다"며 공직자들의 의사 결정을 투명하게 감시하는 내용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외에도 동물권 보호(5만 3천 서명),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대중교통 체계 구축(2만 9천 서명), 유급 출산 휴가 확대(1만 5천 서명) 등 일상의 구체적인 행복을 보장하는 청원들로 가득합니다. 성소수자, 장애인, 원주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 증진을 위한 청원들도 줄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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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org에 올라온 청원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공직자 재산 공개 / 동물권 보호 / 스마트시티 구축 / 이동권 보장 / 녹지 보호 / 국회의원 특혜 축소


유명인들이 서명에 동참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SNS에서 동물 보호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멕시코 변호사 니디아 세르베라(Nydia Cervera)는 '동물권 보호'를 헌법 조항에 추가할 것을 제안했는데요. 그는 '동물도 학대와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존엄성과 지각이 있는 생명'이라며 '동물 학대를 엄격하게 불법으로 규정해야 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청원에 유명 연예인들이 지지 선언을 밝히면서 시민 5만여 명이 청원에 동참합니다. 이 제안은 전문가 위원회에서 검토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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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가수 사샤 소콜의 트위터 (하) 배우 리카르도 클라인바움의 트위터


시민이 헌법 저자가 되는 과정

⓵시민 청원 → ⓶서명 → ⓷전문가 위원회(전문가 27명) 회부 및 검토 → ⓸법률화 및 헌법 초안 수록 → ⓹제헌 의회(국회의원 및 비례대표 100명) 회부 및 개헌안 집필

멕시코의 대안 인터넷 언론을 만든 창립자인 프란시스코 알라니스(Francisco Alanis)는 멕시코시티 헌법 제정 전문가 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그는 위원직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헌법을 만들지도, 쓰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저 시민들의 의견에 살을 붙이고
이것을 법적인 언어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처럼 멕시코시티의 '크라우드 소싱' 헌법 개정은 시민 의견을 들었다고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세심한 설계를 거쳤습니다. 어떤 청원에 1만 명이 서명하면 3명의 전문가 위원이 이를 반드시 검토해야 하며,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온라인 청원의 제안자는 전문가 위원회에 직접 초대되어 제안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27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 위원회는 합법성과 실행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제안을 검토하고 헌법 초안에 반영합니다. 한마디로 평범한 시민들 헌법의 저자가 되는 것이죠. 전문가 위원회에서 이를 걸러낼 수도 있다지만, 수만 명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제안이 완전히 기각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도 투명하게 공개됩니다. 헌법 초안 작성은 MIT 미디어 랩에서 만든 '펍펍(Pubpub)'이라는 문서 작성 툴을 활용해 이루어집니다. 펍펍은 온라인 문서 편집 도구인 '구글 독스(Google Docs)'처럼 여러 명이 함께 문서를 작성하고 수정 내역도 모두 남습니다. 이를 통해 헌법 초안 작성 과정은 멕시코시티 시민뿐 아니라 누구나 지켜볼 수 있으며, 의견도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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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제헌 프로젝트(ConstituciónCDMX)의 문서 작성 툴인 Pubpub의 화면


누구를 위한 개헌인가?

멕시코시티 헌법 초안은 오는 9월 공개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민들이 직접 쓰고, 수 십만 명 시민의 서명을 받아, 전문가 위원회에서 검토하여, 작성 과정을 낱낱이 공개한 바로 그 초안입니다. 이 초안을 가지고 제헌 의회에서 개헌안을 완성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개헌이 진행될 경우는 어떨까요? 시민들은 국회의원들이 만들어 놓은 개헌안 최종본에 대한 가부 결정권만 있습니다. 헌법 내용에 자기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도, 통로도 막혀있는 상황이죠.

* 멕시코시티 제헌 의회

멕시코시티 시민들이 투표로 뽑은 정당 비례 대표 60명과 정부 임명직 40명으로 제헌 의회를 구성합니다. 지난 6월, 60명을 뽑는 비례 대표 선거에서 득표율 1위(33%)를 기록한 곳은 진보 성향의 정당 '국가재생운동(Movimiento Regeneración Nacional, MORENA)'이며, 중도 진보 정당 '민주혁명당(Partido de la Revolución Democrática, PRD)'이 그 뒤(29%)를 이었습니다. 정부 인사 40명은 상·하원에서 각각 14명씩, 대통령과 멕시코시티 시장이 각각 6명씩 임명합니다. 제헌 의회는 오는 9월 15일부터 내년 1월 1일까지 새로운 헌법을 만들게 됩니다.

권력 구조가 밥 먹여주나요?

유급 출산 휴가는 밥 먹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가장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은 당사자들이겠죠. 법을 만드는 사람은 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 전문가'들인 직업 정치인들이 당사자들을 제쳐두고 법과 제도를 만드는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죠.

멕시코시티의 '참여형 개헌'은 두 가지를 시사합니다. 첫 번째는, 직업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입법권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과감한 실험을 했다는 점입니다. 인터넷을 이용해 모든 사람들의 참여와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두 번째는, 이러한 실험이 시민들에게 쉽고 친절한 방식으로 준비될 때, 시민들은 훌륭한 제안과 적극적인 참여로 화답했다는 사실입니다.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회를 얻게 된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준비할 때 정치적 참여의 수준은 훨씬 높아진다는 점이지요.

소수의 국회의원들이 누가 권력을 잡느냐로 토론하고 있을 때, 온라인으로 연결된 시민들은 보다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면서도 일상적이고 따라서 더 풍부한 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도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앉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