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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TERF인 '워마디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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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마드는 낡은 주제다. 워마드의 탄생은 예고된 것이며, 워마드가 창출해내는 담론은 이미 출처가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 워마드에 주목하고, 새삼스럽게 그들의 담론을 파헤쳐야 하는가. 워마드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무엇이며, 질이 좋은 워마드 비판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이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오랫동안 고민했던 바이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몇 가지 사실을 밝혀두려 한다. 필자는 여성으로 지정받은 트랜스 당사자이며, 여성도 남성도 아니지만 여성으로 패싱(passing)한다. 이러한 특성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불리하게 작동하지만, 여성으로 패싱 가능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특권이기도 하다. 수많은 여성전용 공간에서 여성으로의 패싱이 실패한 여성 혹은 논 바이너리 트랜스들이 느끼는 위협을 나는 경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철저히 상황 밖에서 특권을 누리는 자의 입장에서 작성되었음을 명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본격적인 '워마디즘' 비평에 앞서, '메갈리아'와는 구분되는 '워마드'의 특성을 부각시켜 '워마디즘'이 탄생하게 된 시대/상황적 맥락을 살피고자 한다. 또한 '워마드'와 급진적 페미니즘, TERF과의 연관성을 밝힘으로써 '워마드'의 이론적 토대를 밝혀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의된 '워마디즘'을 윤리성과 전략성의 측면에서 비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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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워마디즘'의 탄생

'워마디즘'을 분석하기에 앞서 먼저 워마드의 탄생 계기를 살펴보자. '워마드(WOMAD)'는 한 때 시대를 주름잡던 미러링 사이트였던 '메갈리아'에서 파생되었다. 처음에는 '미러링'이라는 목표를 공유했던 다양한 계층, 섹슈얼리티, 지역적 배경, 학력의 여성(혹은 여성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열할 기미를 보였다. 거대이론으로서 존재해왔던 페미니즘은 한계를 드러냈으며, 페미니즘은 '차이의 정치학'의 이름이 무색하게 여성 간의 차이를 조명하지 못했다.

'(유사)페미니스트'로 각성한 여성들이 자신의 '흑역사'를 공개하는 '천하제일 개념녀 대회'를 하던 때에 올라온 한 게시글은 분열을 촉진시키는 증폭제였다. 글의 내용에 따르면 유부녀인 화자는 게이인 남편에게 이용당하고,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이 글을 접한 모든 '메갈리안'들은 분노했고, 화자를 위로하며 입을 모아 '한남 게이'를 욕했다. 그때 익명의 누군가가 처음으로 '똥꼬충'이라는 워딩을 사용했다. 혹은 익명의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한남 게이'를 욕하기 위해 게이 혐오 발언을 했다. 자세한 사건의 전말은 알 수 없지만, 어느 새 '메갈리아'에서 게이는 한남 중의 한남, 한남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메갈리아'에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복수의 화자를 지닌 목소리는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가진 동시에 성다수자라는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약자 혐오에 동참하면 안 된다는 주장으로 수렴되었다. 또한 여성으로 대표되는 '메갈리안'이 모두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소수이고, '넷-페미니즘史'의 일부로 언급되지도 않았지만, 여성 억압의 영향을 받는, '메갈리아'에서 여성 억압에 저항하는 남성들이 있었다. 즉, '여성스러운' 남성들이었고, 그들 중 다수는 게이였다.

과연 여성 억압의 피해자는 여성뿐인가, 페미니즘의 이름 하에서 게이 악마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똥꼬충'이라는 말로 게이의 남성권력에 저항하겠다는 '메갈리안'들은 결국 '메갈리아'를 떠나, 철저히 '여성'만을 위해 마련된 사이버 공간인 '워마드'를 만들었고, 그들이 떠난 '메갈리아'는 영향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페미니즘-붐의 영향 아래 '워마드'는 명맥을 이어나갔고,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을지라도, 파급력과 결속력이라는 면에서는 메갈리아를 뛰어넘는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워마디언'은 하나의 종(種)이 되었으며, 워마드에서 활동하지 않더라도 워마드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 이윽고 '여성'만을 위한,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즘으로서의 '워마디즘'은 보다 더 고정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메갈리안'이 자신의 독립적인 가치체계에 따라 흩어지기도 하고 뭉치기도 한 것과 달리, '워마디즘'은 복수의, 보다 구체화된 이념 아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메갈리아'가 시민단체처럼 논란이 되는 사안에 힘을 보탰다면, '워마드'는 이를 넘어서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체계를 통합하여 하나의 종파, 학파를 만들었다. '워마드'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등장하였다. 이것이 '워마디즘'의 탄생이다.

II. '워마디즘'은 무엇인가?

' 워마디즘'은 무엇이며 이를 지탱하는 논리적 기반은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워마디즘'은 오직 '여성'만을 위해 존재하며 '여성 우월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워마디즘'은 여성 억압이 가장 유서 깊고 가장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억압이라는 1970년대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 진영의 대전제를 공유한다. 또한 '워마디즘'은 미국 현대의 TERF, 반-포르노/반-매춘 페미니즘(SWERF)으로 대표되는 성 보수주의 페미니즘의 현지화한 버전이기도 하다. 이번 장에서는1970년대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이 '워마디즘'의 이론화에 미친 영향을 밝히고, '워마디즘'이 이를 현지화한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워마디즘'의 형성에 영향을 준 급진적 페미니즘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은 최초의 피지배 집단이며, 둘째, 여성 억압은 사실상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며, 마지막으로 여성억압은 가장 근절하기 어려운 억압 형태로, 계급사회 철폐와 같은 단편적인 변화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아주 뿌리 깊은 것이다.(Jagger and Rothenberg, 1993; 120-121) 1970년대 미국에서 유용했던 이 전제들은 현재까지도 유용하며, 다른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가?

일단 첫 번째 전제를 살펴보자. 여성은 과연 최초의 피지배 집단인가? 만약 원시 모계주의 사회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여성을 최초의 피지배 집단이라 상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최초'의 지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억압의 유서 깊음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람들을 '여성'이라 칭할 수 있는가? 우리가 피지배집단을 여성으로 인식한 근거는 무엇인가?

두 번째 전제는 또 어떠한가? 여성 억압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가? 애초에 우리가 모든 문화 공동체를 사회라고 호명하는가? 중국 윈난의 뭐쒀족 공동체는 모계사회라고 볼 수도 있다. 아이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재산은 어머니에게서 맏딸에게로 대물림된다. 이렇든 여성 억압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닌 사회 문화적 맥락에 따라 형성된 임의적 장치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억압이 가장 근절하기 어려운 억압 형태라면, 어떤 종류의 억압이 근절하기 어려운 형태의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아니다. 질문을 바꿔보자. 특정한 억압이 어느 정도로 근절하기 어려운지 측정하는 의미가 있는가? 물론 여성 억압은 노동자 해방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계급 사회 철폐조차도 단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사회적 주류뿐만 아니라 비주류 - 여성, 비-백인, 장애인, 퀴어, 외국인 등도 계급 사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성과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급진적 페미니즘 역시 시대적 요구에 응한 결과물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 억압은 노동자 계급 남성의 해방으로 해결되리라는 시각이 만연했었고, 여성 해방은 항상 다른 사회 운동의 하위분류로만 여겨졌었다.

그런데 현대 한국 사회는 어떤가? 2010년 후반부터 페미니즘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사회 운동에서 점점 고학력의 품위를 상징하는 교양으로 탈바꿈했고, 비판과 성찰이 부재한 '페미니즘을 위한 페미니즘'이 담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의 '급진성'은 어떻게 변질되며, 그것은 어떤 부작용을 초래할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워마디즘'은 이처럼 그 이론적 근간을 급진적 페미니즘에 빚지고 있지만, '워마디즘'을 급진적 페미니즘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여성 억압의 역사성, 광범위성, 근절 불가능성을 강조함은 그동안 논란 밖에 있던 여성 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반면 '워마디즘'은 여성 억압의 이러한 속성을 강조함으로써 여성 억압의 해결이 최우선적인 과제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는 '억압 줄 세우기'로도 이어지는데, 그 어떤 억압도 여성 억압보다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이다.

'워마디즘'에 따르면 여성은 모든 사회적 약자보다 처지가 나쁜 하층 계급 중에서도 최하층 계급이다. 여성 이슈 외의 문제는 논의할 가치가 없다. '여성 장애인'이 있다면 그의 소수자성은 장애 여부가 아니라 성별이다. 여성이 모두 최하층 계급이기에 장애인 여성과 비-장애인 여성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여성의 경험은 환원되고 모든 여성이 공유하고 있는 억압 - 즉, 특권층 계급 여성이 겪는 억압이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된다. '워마디즘'의 시대에 이르러서 차이의 정치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워마디즘'은 또한 급진적 페미니즘이 그러했듯이,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여성 억압에 미친 영향에 주목했다. 여성이 재생산을 거부하면 여성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슐라미츠 파이어스톤의 주장이 '워마디즘'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다. 특히 '여체'를 가진 사람이 가축 취급을 받는 현대 한국 사회8에서 신체 억압과 여성 억압의 연관성은 아직도 영감을 준다. '워마디즘' 목표는 단지 부정(不淨)하다고 여겨진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삼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월경을 경험하고, 임신/출산을 경험하는 몸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몸 형태가 되는 사회. 적어도 '워마드'라는 넷-공동체에서 '여체'를 가진 사람은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 호명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복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전제하게 된다. '여체'를 정의하는 기준은 매우 협소할뿐더러, '여체'를 가진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워마드'라는 이름의 이갈리아가 타자(여성)를 주체(남성의 자리)로 소환하는 전복적 세계라고 해도, 비체(트랜스젠더)는 결국 비체에 머무를 뿐이다. 그런데 '워마드'의 전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체'의 경험과 '여체' 그 자체를 터부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여체를 긍정할 수 있었는가? 결국 '워마디즘'은 '여체'에 대해 일종의 타협을 하게 된다. '워마디즘'을 숭상하는 여성들은 재생산 그 자체가 아니라, 재생산 능력이 있다고 기대되는 몸의 형태를 자기긍정의 원천으로 삼는다. '여체'를 긍정할 만한 현실적인 이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여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체'를 원한다는 것은 '여체'의 상품성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가부장제 사회의 '여체' 대상화에 기인한다. 성적 대상화 자체에 반대하는 '워마디즘'의 반-포르노的 성격을 고려하면 이러한 전략은 모순적이다. 재생산 능력은 철저히 현실 사회의 가치체계의 영향을 받으며, 월경 혹은 임신/출산 경험 자체는 '여체'를 가진 사람에게 아무런 기쁨과 보람을 주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이러한 측면을 긍정하고자 해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개인에게 재생산 가능성은 부정적 영향을, 신체의 상품성은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신체의 상품성 면에서는 '여체'가 '남체'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바이섹슈얼은 남성보다는 (대체로 '여체'를 가질 것이라 추측되는)여성을 데이트 상대로 더 선호한다. 가장 고임금을 받는 성노동자는 용모가 뛰어난 비-트랜스 여성이다.

미디어에서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은 '여체'이지 '남체'가 아니다. 이브 세즈윅에 따르면 호모소셜은 성애와 결부되지 않은 남성 간의 유대를 위한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로 인해 '여체'가 욕망의 대상인 반면, '남체'는 욕망할 가치가 없는 탈성화된, 남성이라는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또한 '워마디즘'은 '여체'를 긍정하기 위해 '남체'의 열등함을 주장한다. 그들은 '남체'가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남근'에서 찾았다. '남근'은 성욕, 즉 불필요하며 통제 불가능한, 궁극적으로는 여성에게 해가 되는 욕망의 근원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상 남근 선망의 원리를 살짝 비튼 것에 불과하다. '남근'은 쾌락(성적 실천)의 근원이기에 남근 성립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만약 성적 실천의 가능성, 혹은 성적 욕망 그 자체를 긍정적 요소(쾌락, 환희)가 아니라 부정적 요소(강간과 여성 살해의 동기)로 본다면 '남근'은 숭배의 대상이 될 구실을 잃을 것이다. 이로써 '머릿속에 좆물만 가득 찬 새끼', '좋아서 정액 질질 흐르네.'라는 비아냥거림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워마디즘'은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공간적 맥락을 제거하여 한국 사회에 적용시킨 결과물이다. 그러나 시/공간적 맥락을 제거함으로써 '워마디즘'은 윤리적, 전략적 측면에서의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다음 장에서는 혐오 재생산이라는 윤리적 측면에서 '워마디즘'을 비평하고자 한다.

III. 윤리적 측면에서의 '워마디즘' 비평

학문은 학자의 산물이기에 학자가 경험했던 혹은 경험 중인 사회적 맥락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으며, 학자의 편견을 반영한다. 결국 학문은 주류중심적일 수밖에 없다11. 이를 전제하고도 페미니즘의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관점에서 '워마디즘'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다. 대체로 학문은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며, 배제는 혐오이기에, 페미니즘과 '워마디즘' 간의 결정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고, 학문이 지식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라면 우리는 학문의 편향성을 경계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약자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념에 학문적 권위를 부여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워마디즘'의 윤리성을 점검하는 일은 페미니즘의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학문의 편향성을 해소하고, 악용을 경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워마디즘'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혐오를 정당화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는 '미러링'으로 인한 혐오이다. '메갈리아'가 존재했던 시절에 여성 혐오 발언을 '남성 혐오 발언'으로 반전시킨 것을 넘어서서 '워마디즘'의 시대에는 여성 억압적인 구조 자체가 '미러링'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별 이중 잣대였고, '워마디즘'은 특권층 남성 중심의 사회를 전복하여 특권층 여성 중심 사회라는 이상을 만들어냈다. 기존 성별 이중 잣대에 따르면, 남성의 소수자성은 용인되고, 여성의 소수자성은 여성 억압을 강화할 빌미가 되었다.

물론 '워마디즘'에 의해 재편된 세계는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 자체는 남성권력이 필연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기존 패러다임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워마디즘'의 세계에서 가난한 여성은 가난한 사람이지만, 가난한 남성은 '거지새끼'이고, 장애인 여성은 장애인이지만, 장애인 남성은 '병신'이다. 여성 성노동자는 불쌍하지만, 남성 성구매자는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사람이고, 남성 성노동자는 '후팔 새끼'다.

레즈비언은 퀴어 중에서도 최약자인 동정의 대상이자 남성이 없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다. 반면, 게이는 남성권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여성을 착취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형태의 체제 수호자이다.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이갈리아를 모토로 삼았지만, 이갈리아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등장한 계기는 '워마디즘'이 제공했다.

그렇다면 미러링은 왜 문제가 되며, 왜 미러링은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려운가? '미러링'은 간편하고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다. 받은 것을 인식하고 이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미러링'에는 성찰도, 자성도 비판도 필요없다. '미러링'에 필요한 것은 '각성한' 당사자들과 세계를 재편하려는 분노의 정동뿐이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 '미러링'은 어쩌면 저학력, 저소득 등의 소외 계층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따라서 '미러링'의 확장으로서의 '워마디즘'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기존 체제뿐만 아니라 '워마디즘'을 통해 재편성된 체제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기존 체제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면, '워마디즘'의 체제는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 그 자체다. 기존 체제와는 달리 '워마디즘'의 체제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워마디즘'이 진정 여성해방을 추구한다면, 왜 '워마디즘'이 제시하는 대안적 세계에서 빈민층 여성, 퀴어 여성, 장애인 여성, 외국인/비-한국계 여성, 노년 여성은 여전히 피라미드의 밑부분을 차지하는가.

'워마디즘'은 특권층 여성 중심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여성'을 제외한 소수자성으로 인한 고통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소외계층 여성은 특권층 여성에게 이입하며 그들의 권익을 최우선적으로 여기게 된다.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남성의 문제가 인류 전체의 문제로 둔갑했듯이, '워마디즘'의 영향으로 특권층 여성의 문제는 여성 전체의 문제로 둔갑하게 된다. 동성(同性) 간 차이의 무화나 상쇄는 남성 중심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호모소셜에서 '성애가 배제된 유대'가 가능했던 이유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남성'이라는 공통점에만 주목하고 차이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워마디즘'이 추구하려는 것은 호모소셜의 여성판인가? 그렇다면 '워마디즘'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기 어려울 것이다.

'워마디즘'의 '미러링'은 또한 '남성 가해자 - 여성 피해자'라는 인식틀을 절대화함으로써 약자 혐오를 정당화한다. 발화자의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위치에 의해 '미러링'은 폭력이 아니라 대항폭력으로 인식된다. 이는 소수자성이 유리하게 작동하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가장 절대적인 피해자'가 가장 많은 발언권을 얻어야 한다면, 여성 중에서도 빈곤층, 외국인/비-한국계, 장애인, 노년층 퀴어 여성의 주장이 최우선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마디즘'은 주로 특권층 여성의 이권을 대변한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워마디즘'은 여성 중에서도 복수의 소수자성을 지닌 이들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최하층민으로 규정한다. '워마디즘'이 추구하는 전복된 세계에서 여성은 인간의 기본형이었지만 '워마디즘'의 분석에 따르면 현실 세계에서 여성은 가장 많은 억압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시각에 의해서 특권층 여성이 소외 계층 남성보다 더 억압받는다는 주장은 가능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물론 특권층 여성은 소외 계층 남성보다 강간, 살해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와 동시에 특권층 여성은 소외 계층 남성보다 조금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양질의 사회적 보장을 받을 확률이 더 높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중에 '진정한' 약자는 누구인가? 억압의 '진정성'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억압의 줄 세우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의중은 무엇인가?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보다 가치 있다는 사고관은 여성의 고통은 남성의 고통만 못하다는 주장과는 얼마나 다를까? '측정 가능한 억압'이라는 환상은 여성 억압이 다른 종류의 억압들을 모두 상쇄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워마디즘'은 아무리 특혜를 입었다한들 이는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소수자성을 논외로 해도 모든 여성은 여아 낙태, 성폭력, 젠더폭력의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특권층 여성이 받는 강간 위협과 소외 계층 여성이 받는 강간 위협이 같을 수 있는가? 강간이 권력형 범죄라면, 특권층이라는 지위는 비교적 그 위협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강간을 당했더라도 법적 공방에서 계급이 유리하게 작동할 경우가 많다. 충분히 교육받았기에 '강간'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도 더 다양할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이지만 이는 강간이 뭔지도 모르는, 착취가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착취임을 알지 못하는, 인적, 물적 자원이 전무한 소외계층 여성의 처지에 비춰보면 그것은 특권이다. 특권은 '특혜'가 아니다. 특권은 내가 당연하게 보장받지만 어떤 이들은 결코 보장받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자아성찰, 즉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는 억압에만 집중하여 자신의 특권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억압에 동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워마디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며, 윤리적 측면에서 사실상 페미니즘보다 못하다.

둘째는 '여체 우월주의12'에 의해 발생하는 혐오이다. '워마디즘'은 다른 모든 소외 계층 여성은 충족시키더라도, 특정 범주의 여성들만 충족하지 못하는 '여성됨'의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여체=여성'이라는 '워마디즘'의 여성관이다. '워마디즘'은 섹스만이 실제하고 젠더는 허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는 가짜이고 세상에는 오직 '여성스러운' 남성과 '남성스러운' 여성만 존재한다.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은 사람은 성 전환 수술을 하든, 성별 재지정을 받든 남성일 뿐이다.

'워마디즘'을 한국형 TERF라 명명할 수 있을 만큼, '워마디즘'의 트랜스 혐오는 다른 어떤 종류의 혐오보다도 노골적이다. 주로 성 전환 수술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초점을 두는 현대 미국의 TERF과는 달리, '워마디즘'은 성전환 수술, 젠더 수행 그 모든 면에서 트랜스젠더를 비난한다.

특히 MtF의 성전환 수술은 여성을 '여성기'와 '유방'을 가진 사람으로 환원하며, 트랜스젠더의 여성성 수행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화한다는 것이 비난의 근거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모순적인 주장이다. '워마디즘'은 비-트랜스 여성의 성형, 다이어트를 비난하는 빌미가 되지는 않는다. 비-트랜스 여성이 '여성스러운' 젠더 수행을 한다 해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물론 전통적인 '여성스러움' 자체를 비난하며, '여성성'을 새롭게 정의하자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이는 소수이다.

대부분의 경우 트랜스 여성은 남자인 주제에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감히 여성 전용 시설을 이용하려 하며 공간을 침범하는 남성으로 여겨진다. '워마디언'들은 트랜스 여성을 아웃팅하고, 성 중립 화장실을 마련해달라는 트랜스 여성 활동가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크로스드레서는 감히 여성의 옷을 입는 변태고, 트랜스 여성은 남자 주제에 감히 성형에 성 전환까지 한 사람일 뿐이다. '워마디즘'의 트랜스 여성 혐오의 기저에는 여체 우월주의가 있다. 옷으로도 가릴 수 없고, 성전환으로 얻어지는 게 아닌 '원본', 그것이 되는 몸이라는 개념이 있다.

트랜스 여성이 비-트랜스 여성보다 패싱이 더 잘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워마디즘'의 영향 아래에서 비-트랜스 여성들은 트랜스 여성을 혐오하며 (아마도) 처음으로 기본형이 된 자신을 '긍정'한다. 그런데 트랜스 여성이 트랜스 혐오의 유일한 피해 집단은 아니다. MtF과 유사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FtM 혹은 논 바이너리 역시 혐오의 대상이 된다. FtM을 바라보는 '워마디즘'의 시각은 다음과 같이 양분화된다.

첫 번째는 FtM을 남성권력을 선망하는 여성으로 보는 시각이다. 임금차별, 강간위협, 여성 살해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여성들이 남성이 되기를 택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남성으로 정체화 하는 데 오직 여성 억압만이 영향을 미쳤음을 전제한다. 그러면서 '워마디즘'은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깨우쳐야 한다며, 성별 고정 관념에 대항하는 방식은 성 전환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성별 고정 관념에 대항하는 방식이 꼭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각으로 이어져야만 하는가? 성 전환이 여성 억압에 반발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체가 너무나도 우월하고, 여성의 가치는 여체에서 찾을 수 있기에 그걸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는 것인가?

두 번째는 MtF나 FtM이나 다 똑같다고 보는 설명이다. FtM은 여성의 젠더 수행을 협소하게 정의하고, 감히 '여체'를 버리고 열등한 '남체'를 택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MtF'와 'FtM'을 각각 'MtT'와 'FtT'라 부르며 그들은 절대 '진짜'가 되지 못한다고 조롱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논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에게는 'MtT'나 'FtT'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워마디즘'은 논 바이너리 트랜스에게 우호적인가? 안타깝게도 '워마디즘'은 패싱 가능한 성별을 통해 논 바이너리 트랜스의 성별을 인식한다. 인식주체에 따라서 논 바이너리는 때때로 여성이고 때때로 남성이지만 절대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로는 호명되지 않는다. 논 바이너리의 존재는 퀴어 사회에서도 논쟁적이며, 논 바이너리 혐오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바가 없기 때문에 이 글에서나마 좀 더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2016년 말쯤 트위터에서 #나는_젠더퀴어이다 해시태그가 유행했고, 젠더퀴어를 포함한 다수의 논 바이너리 트랜스들이 이에 동참했다. 그 중에는 논 바이너리 트랜스로 정체화한 커플도 있었는데, 그들의 셀카가 '메갈리아'의 전신이라고도 알려진 A 갤러리에 유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못생겼으니까 젠퀴나 하고 있지', '남자도 여자도 못 되어서 젠퀴를 하는 건가', '타고난 성을 버리다니 부모님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등이 주된 반응이었다. 두 사람은 여성 패싱이 되어 '가위충'이라고도 불리고, 둘 중 한명이 남성 패싱이 되어, 남성 패싱이 된 쪽이 여성 패싱이 된 쪽을 착취하는 것처럼 재현되기도 하였다. A 갤러리는 '워마드'와는 성질이 다른 집단이지만 '워마디즘'이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A 갤러리의 '젠퀴벌레', '젠띠퀴어'나 '워마드'의 '젠신병자'나 지시하는 대상과 혐오하는 방식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미러링'과 '여체 우월주의'는 '워마디즘'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주된 논리적 기반인 동시에 '워마디즘'의 혐오 정당화에 기여한 요소이기도 하다. 과연 '워마디즘'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윤리적 측면에서 더 발전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비관적이다. 내부 비판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면에서도 발전하기 어렵다. 결국 '워마디즘'은 역사에 오명만 남긴 채 영영 사라지거나 혐오의 대상만 바꾼, 발전하지 못한 이론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IV. 전략적 측면에서의 '워마디즘' 비평

'워마디즘'의 전략적 실패는 앞장에서도 일부 드러났으나 이번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려 한다. 앞장에서 언급했듯, '워마디즘'의 시각에서 억압은 측정 가능하며, 다른 종류의 특권으로 상쇄 가능하다. 또한 '워마디즘'은 여성 억압을 최우선 과제로 상정하고, 다른 종류의 억압을 과소평가한다. 이러한 배제성은 필연적으로 연대의 실패를 초래한다. 그리고 '워마디즘'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는 '여체 우월주의'는 전략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양날의 검이다. 이는 '여체'를 가진 여성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동시에, 그 여성들이 '여체'를 유지하도록 강요한다. 그뿐만 아니라 '워마디즘'은 여성의 젠더 수행을 획일화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등 여성 억압에 반대하기 위해 외려 여성 억압을 조장하기도 하는 모순성을 지닌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는 '워마디즘'의 배제성과 모순성으로 인한 전략적 실패에 주목하려 한다.

흔히 연대는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겨진다. 물론 성폭력생존자가 모두 여성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여성주의자가 모두 퀴어 운동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는 아닐지언정 전략적 측면에서 연대는 필수적이다. '평등의 몰락'에서 리사 두건이 지적했듯이, 계급정치(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와 정체성정치(시민권과 시민적 참여에 대한 배제와 가정생활에서의 위계에 대한 저항)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계급정치와 정체성정치가 결합된 결과물로서, 부와 혜택이 위로 향하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백인 비-퀴어 남성의 손에 들어가는 데 기여한다. 이 저서에서 리사 두건은 법질서 정책, 고등 교육, 퀴어 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측면에서 신자유주의가 아래로 향하는 재분배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던 원인을 살폈다. 그녀가 계급정치와 정체성정치를 연관 짓는 방식은 매우 참신하지만, 이러한 통찰에 내재된 기본 전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체제의 중립성'이라는 신화와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자유주의의 허위성을 향한 비판은 급진 페미니스트가 존재했던 시절부터 제기되었다. 아무리 체제에 적합한 인물이더라도 여성은 채용/승진 대상에서 밀려났고,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영역은 '사적' 영역이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게이가 근본적인 사회 변화나 사회 개혁을 지지해야 한다는 진보적 주장에 반대한다'는 독립게이포럼의 선언문에서 '게이'의 자리에 '여성'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워마디즘'의 공통된 입장이 된다. '워마디즘'은 문화정치와 정체성 정치에 매몰되어 계급과 여성 간의 관계를 포착해내는 데 실패한다.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 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큰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자신이 속한 집단이 겪는 억압과 외집단의 억압을 연관시키지 못하고 어떠한 종류의 연대도 거부하는 것은 독단적이라 이론으로서의 위상을 얻기 힘들며, 운동으로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배제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운동은 비도덕적인 방안은 아니라한들 전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성이 모두 맑시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맑시스트, 퀴어 운동가가 되는 일이 바람직하며, 이는 모든 활동가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연대는 단지 수적인 우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를 통해서 우리는 힘을 얻고, 정신적 지지를 얻고 새로운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외집단을 배제하는 이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미덕(美德)이다.

왜 페미니즘은 왼쪽 날개를 폈을까? 여성의 대부분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은 단지 물질적 측면에서의 박탈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열악한 노동환경, 추가 노동, 낮은 사회적 지위와 더 적은 자유와 기회를 의미한다. 왜 지금 이 시점에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이 회자되는 것일까? 차이의 정치학으로서 페미니즘 거대이론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여성 억압은 단일한 억압이 아니며, 이것이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음은 선구자적인 이론가들, 사회운동가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인지한 부분이다. 이를 고려하면 '워마디즘'은 새로운 이론이라기보다는 거대이론의 영향력을 되살리려는 복고주의이다. 그런데 '워마디즘'의 복고는 의미가 있는가? '워마디즘'은 단일한 여성 억압 모델을 제시하며, 여성들 간의 단결을 촉구한다. '워마디즘'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더 큰 힘과 영향력을 획득하고자 했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여성 억압 외에도 하나 이상의 억압을 경험하는 여성들은 '워마디즘'이라는 흐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워마디즘'은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가? 적어도 여성 중심적으로 재편된 계급사회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워마디즘'은 이러한 전략을 취하고 있고, 이는 현재까지는 유효하다. '워마디즘'은 어떻게 소외 계층의 여성들이 자신의 권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일까? 그 정답은 바로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혐오'라는 거대한 정동에서 찾을 수 있다. '여성'과 '여성성'을 정의하는 방식은 상이하다. 여성 억압은 단 한 번도 '공평하게' 작동한 적이 없었으며, 여성 개개인의 경험은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한들 동일하지는 않다. '여성'은 허상이고 '자매애'는 불가능해 보인다. 꺼져가는 '자매애'에 불을 붙인 건 다름 아닌 트랜스 혐오였다. 그들은 트랜스 혐오를 통해서 연대했고, 트랜스 혐오를 통해서만 그들은 연대가 가능했다. 많은 퀴어 페미니스트들은 '워마디언'이 주류 남성을 비판하는 대신 트랜스 혐오에 몰두하는 데 '비효율적'이라 비판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트랜스 혐오라는 장치를 통해서 여성 간의 차이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꺼이 윤리를 버리면서까지 차이를 상쇄하고 자매애를 고취시키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다. 따라서 트랜스와 비-트랜스의 경계가 흐려지고, 특정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개개인의 차이가 부각되는 한, '워마디즘'의 설득력은 점점 떨어질 것이다.

'워마디즘'은 연대의 실패를 초래한다는 면에서 배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순적이다. 특히 '워마디즘'의 기저를 이루는 '여체 우월주의'는 여성 억압에 반발하기 위해 착안되었으나, 이는 점점 여성들을 속박하는 족쇄가 되었다. 여성 억압에 반발하기 위한 '워마디즘'의 여성억압이 가지는 모순성은 신체 정상성 규범 재생산과 획일적 젠더수행 강화라는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다.

'여체 우월주의'는 비-트랜스 여성의 여성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젠더화된 몸에 순응할 것을 강제했다. '여체'가 금기와 부정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트랜스든 비-트랜스든 여성이라면 모두 자신의 신체에 거부감을 느낀다. 여성들은 결코 이상적인 '여체'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이에 '워마디즘'은 '여체'에 대한 거부감은 여성혐오에 기인한 것이기에 여성이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요구는 과연 정당한가? 여성이기에, '여체'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기에 우리는 이것의 모든 측면을 긍정하고 '변함없는' 몸을 수용해야 하는 것인가? 여성 억압의 영향력이 강한 사회에서 대다수의 여성은 한때나마 남성이 되기를 꿈꾼다. 남성 권력을 획득한, 혹은 적어도 여성 억압의 영향을 받지 않는(받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남성의 몸을 선망한다. 여성들 중 몇몇은 억압기제에 순응하고, 몇몇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로 각성하며 그리고 몇몇은 남성됨을 택한다. 이때의 '남성됨'은 단지 남성에 준하는 존재로서 여성으로 정체화한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인식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남성됨을 승인받기 위한 직접적인 과정(호르몬 투여, 성 전환 수술, 성별 재지정)을 거치는 경우를 포괄한다.

'워마디즘'은 여성의 '남성됨'은 도피에 불과하다며 '빨간약을 먹고 현실을 깨달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과연 페미니스트로서의 각성이 여성 억압의 유일한 대응책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대응이며, 모든 이에게 이를 강제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트랜스젠더리즘은 여성 억압을 해체하는 데 페미니즘만큼이나 기여할 수 있다. 여성 억압에 반발하는 것이 윤리적이라면, 트랜스젠더리즘은 윤리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전혀 없다.

'워마디즘'은 트랜스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실패한 여성으로 간주하지만,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은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여성 억압 기제에 균열을 내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해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따라서 트랜스 남성은 페미니즘의 대의를 저버리고 남성권력에 편승하였다고 보는 '워마디즘'의 시각은 모순적이다.

그리고 트랜스라 정체화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여체라고 여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체'는 주류 남성의 필요에 따라 성적 대상화되었다가도 상품성이 떨어지면 '여체'를 가진 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탈성화된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여체'를 가진 여성들이 자신은 여성의 자격이 없다고 자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선망할 만한 '여체'는 결코 인간의 몸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늙지도, 다치지도, 병들지도 않는, 변색이 없고 체취가 없는 이상적인 '여체'는 사람의 몸이 아니라 인형이다. 그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은 격한 운동을 하지 않고, 체중조절을 하고, 자주 씻으며 각종 수단으로 체취를 가리도록 요구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여체'라고 밝히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면 충족시키기 어려운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남체'는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몸이지만, '여체'는 가장 (대상화하기에) 이상적인 형태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여성도 '여체'에 부합하지 못할까봐 불안감을 느끼며, 이 불안감은 트랜스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비-트랜스 여성이 트랜스 여성보다 대체로 패싱이 용이하다고 가정하더라도(그 가정은 사실이 아니지만), '여체 지상주의'의 영향 아래 그들은 여전히 '이상적인 여체'라는 신체 정상성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워마디즘'은 '여체'를 긍정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고취하고자 했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여체'를 가꾸고 유지하는 일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워마디즘'의 영향 아래 여성은 여성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서 자신을 혹사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 억압에 대항하는 것이 '워마디즘'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워마디즘'은 그 자체로 전략적 실패이다.

섹스가 진실이며, 젠더는 허상이라 주장하는 '워마디즘'은 또한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여성성을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 '워마디즘'의 시각에서 여성성은 불편함을, 남성성은 편안함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류는 허상이며 여성들은 편안함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는 한 편으로는 1970년대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닮아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임의성을 지적해낸 후기 구조주의 페미니즘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워마디즘'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있어서 후기 구조주의 페미니즘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임의적이기에, 다양한 여성성과 남성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후기 구조주의 페미니즘과는 달리 '워마디즘'은 여성성과 남성성은 허구이기에 이를 전면 부정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워마디즘'은 이론화 과정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접근만큼은 신자유주의에 빚을 지고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접근하는 방식에만 주목한다면, '워마디즘'을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온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특정 사회적 집단의 인물상을 재현할 때, 긍정적 속성은 항상 보편적 주류에게 돌아갔고, 부정적 속성은 항상 사회적 약자의 몫이었다. 따라서 남성성은 그 시대의 가장 긍정적인 가치를 대표했고, 여성성은 늘 그 반대에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합리성, 중립성, 생산성이기에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속성들은 남성성의 영역에 있게 되었다. 페미니즘 이론은 신자유주의의 가치가 남성성을 대표하게 된 요인인 시대/상황적 맥락을 읽어냈으나, '워마디즘'은 시/공간적 배경이 남성성의 구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워마디즘'은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는 자유주의적 전제에 입각하여, 사회는 외부의 영향 없이(애초에 사회 구성원을 사회와 분리하여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합리적이었던 여성들을 비-합리적인 존재로 길들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여성 억압은 여성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워마디즘'은 여성에게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 일련의 기제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하는 여성을 계몽하려 한다. 일부러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여성스러운' 어조로 말을 하고 '여성스러운' 몸짓으로 행동하는 여성들부터 결혼을 선택하고, 임신과 출산을 감행하고 가사노동, 돌봄 노동과 육아노동을 택하는 여성들까지 모두 '워마디즘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여성이 사회적 강요에 의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여성성을 수행하는 것은 용인되지만, 여성이 억압 기제 속에서 적응하고, 신자유주의의 가치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느 새 가장 바람직한 수행은 여성성 혹은 남성성 수행이 아닌 합리성의 수행, 즉 가장 시대상에 들어맞는 수행이 되어 있다. '워마디즘'은 스스로 거대 이론으로 거듭나거나 이에 비견할 만한 파급력을 갖추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서 신자유주의는 보편화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는 여성 친화적인가?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중립성과 합리성이라는 모습 아래에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시스-이성애중심주의 등의 병폐를 감추고 있다.

'워마디즘'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재정립할 때 신자유주의의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 보기 어렵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권익을 위한 이념, 즉 페미니즘('워마디즘'은 페미니즘이라 보기엔 자격이 미달되기에 일부러 둘을 구분하고자 한다)은 여성의 주체성, 자유를 옹호해왔다. 페미니즘이 획일적인 여성성에 반대한 이유는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성에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워마디즘'은 오히려 여성에게 획일적인 선택을 강요하며, 특정 이념에 어긋난 선택을 한 여성들을 비난하는 빌미가 된다. 이렇듯 획일적인 젠더 수행을 강화하는 '워마디즘'은 궁극적으로는 여성 억압적이다.

'워마디즘'은 사회 운동에 필수불가결한 연대의 실패를 초래하고, 여성 억압에 반한다는 명목으로 외려 여성 억압을 조장한다. 앞장에서 살펴봤듯이 '워마디즘'은 윤리적인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고, 전략적으로도 전혀 새로운 통찰을 주지 못하는 실패한 이데올로기이다. '워마디언'들은 기꺼이 페미니스트라는 칭호를 버리고 페미니즘의 무용함을 비난했지만, 페미니즘에 여러 맹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마디즘'은 페미니즘만큼의 명분과 정당성, 학문적 권위를 얻기도 어려워 보인다.

V. 결론

'워마디즘'은 페미니즘인가? 이 질문은 마치 '우생학은 생물학인가?'라는 질문만큼 터무니없게 들린다. 놀랍게도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은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페미니즘 담론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워마디즘'을 급진적 페미니즘의 변형으로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TERF의 확장판으로 보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는 이에 한 가지 질문을 더 덧붙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페미니즘은 단지 여권 신장을 위한 이념을 의미하는가, 혹은 그 이상을 의미하는가? 만약 페미니즘이 특권층 여성의 권익만을 대변하는 운동이라면, 페미니즘은 도덕적 명분을 확보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줄 수 있었을까? 페미니즘 담론이 페미니즘 운동을 위한 자양분이라면, '워마디즘'은 전략적 측면에서 바람직한가?

어떤 이론이 페미니즘의 범주에 속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째, 여성은 체계적으로 억압되어 왔음을 가정한다. 둘째, 젠더 관계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전제한다. 셋째, 불평등한 젠더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의 의미를 포함한다 .

'워마디즘'은 가까스로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킬지 모르지만, 나머지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워마디언'은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 그러나 '워마디즘'은 페미니즘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페미니스트 개개인은 부도덕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혐오를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혐오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인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 글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워마디즘'을 포함하여 약자 혐오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에 학문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트랜스 당사자로서 페미니즘 진영 내의 트랜스 배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것을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친다.

* 이 글은 트랜스젠더퀴어 생애 기록모임 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