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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간 전화회담과 한국 외교의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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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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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뒤 10, 11일 이틀 동안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10일), 시진핑 중국 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11일)와 차례로 전화 통화를 했다. 일종의 전화 정상회담인 셈이다.

특히, 외빈이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취임식이 열린 상황에서 미국, 중국, 일본 정상과의 전화 대화는 첫 외교무대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격상 정상들 간의 전화 내용이 다 발표된 것은 아니겠지만, 발표된 내용만으로 볼 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듯한 인상이다. 그래서 뿌듯한 감도 있다.

사실 현재 우리나라는 내부의 양극화, 청년실업 등도 큰 문제이지만, 나라의 안위와 관련한 외교안보도 큰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과는 대북정책의 기조에 대한 의견차이가, 중국과는 사드 배치 갈등이,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모두 만만치 않은 난제이다. 전화 통화에서 할 말을 하고 앞으로 정상회담을 해 논의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니 출발로서는 그런대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좀 아쉬운 것은 전화 통화의 순서에 좀 변형을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미국이 첫번째 전화 상대라는 것은 유일한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이번엔 순서를 좀 바꿨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이 역대 처음으로 일본에 앞서 중국을 방문하자, 일본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을 감안하면 큰 노력을 하지 않고 작은 배려로 일본의 마음을 살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와는 통화를 안 했는데, 인도 총리와 통화를 한 것은 사정이 어떻든 눈에 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위상이 떨어지고 인도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고도 할 수 있고, 국제정세를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혹시 중국 견제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궁금하다. 하지만 취임 초 주변 4국에 머물지 않고 전화 정상회담의 상대를 인도까지 확장한 것은 우물안 한국외교의 지평의 확대라고 볼 수 있겠다.

외교 지평의 확대와 관련해 좀 아쉬운 대목은 유럽 쪽 정상과 통화를 안 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새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과는 일부러라도 통화를 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크롱과 문 대통령은 하루 차이로 거의 동시에 취임한 사이이고, 임기도 5년으로 같아 임기를 같이 할 가능성이 크다. 처음부터 이런 인연을 매개로 좋은 친분을 쌓아 놓으면 많을 도움이 될 텐데.

또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선거 결과는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으로 이어지는 반자유무역-쇄국주의-반국제주의 흐름에 제동을 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일종의 퇴행적인 세계흐름에 브레이크를 건 동지이기도 한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미국의 독주를 벗어나 상대적인 자주외교를 펼치려면 미국을 견제하는 나라들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한데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그런 나라들의 대표이다. 유럽연합의 또 다른 주축국인 독일과 사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지금 나오는 보도를 보면, 조만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특사를 보내고, 이들 나라와의 정상회담도 서두를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특사를 빨리 보내고 정상회담을 빨리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국의 정상을 만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 정책, 철학을 정비하는 것이다. 정리된 우리 생각 없이 빨리 만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가는 상대의 생각과 의도에 말려들 가능성만 커진다. '선 전략, 정책 정비 후 정상회담, 특사파견'의 순서가 절대로 맞다. 자칫 만나는 것에만 신경 쓸 경우엔 내실은 없고 의전만 승한 한국외교의 고질을 반복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