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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와 크라우드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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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25일, 대만 정부는 천재 프로그래머인 오드리 탕을 디지털 총무 정무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35살 청년이 디지털 부문을 총괄하는 장관이 된 것이지요. 그는 대만의 최연소 장관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트랜스젠더 장관입니다. 24살 때 자신의 성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꾼 트랜스 여성이라 합니다.

1년 뒤인 2017년 3월25일,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 김승섭 교수팀은 새로운 연구과제의 시작을 알립니다.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에 관한 연구입니다. 연구자들은 의료보험 사각지대에서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는 트랜스젠더들의 건강 현실을 분석할 예정이라 합니다. 참고로 영국과 덴마크 등 32개 국가에서는 호르몬 요법은 물론이고 성전환 수술 비용까지 국가건강보험 같은 공공 의료 체계를 통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연구자는 대개 정부나 공공재단, 기업의 후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국가나 기업이 연구비를 대기가 여의치 않은 과제도 있습니다. 사업성을 먼저 따질 수밖에 없는 기업이나 소수자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현 정부 정책의 한계를 떠올리면,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가 그런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승섭 교수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김 교수는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마침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도 크라우드펀딩 연구 지원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시민이 원하는 연구과제를 시민이 직접 후원하는 대안적 방식입니다. 펀딩을 추진할 뿐 아니라 연구과제를 평가해 그 내용을 공개할 계획도 세워두었지요. 결과 중심의 정량적 평가가 아니라 성실한 실패를 인정하는 과정 중심의 정성적 평가가 이뤄질 것입니다. 김승섭 교수를 포함한 연구자 다섯명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는 이렇게 해서 ESC 크라우드펀딩 1호 과제가 되었습니다.

연구비는 2000만원이고, 목표 모금액은 1000만원이었습니다. 부족분은 ESC가 특별 기부금을 받아 충당하기로 하였고요. 크라우드펀딩은 2017년 1월25일부터 60일 동안 아홉 편의 글을 올리며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3월25일, 시민 438명의 후원으로 1600여만원을 모금하며 목표를 164% 초과달성하기에 이릅니다. 감동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공공적 성격의 연구가 시민의 지원으로 가능해졌으니 말입니다.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원하거나 받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성과 타고난 생물학적 성이 다른 사람을 모두 일컫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원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 또 자신의 성을 어느 하나로 정의하지 않는 젠더퀴어도 있습니다. 펀딩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그동안 제가 트랜스젠더에 관해 너무도 몰랐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르몬 요법이나 성전환 수술 관련 경험이 부족한 의료현실, 의료보험 보장의 부재, 성별 수정에 앞서 성전환 수술을 강요하는 제도,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겪어야만 하는 일상적 고통....

대만의 사례는 부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트랜스젠더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단지 뛰어난 트랜스젠더가 활약할 수 있길 바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하게는, 동료 시민이 소수자라는 이유로 고통받아선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의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시민의 힘으로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가 시작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돼 기쁩니다. 앞으로 이런 연구는 정부가 지원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