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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비움, 나이 듦과 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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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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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엔 학부에서 '신호와 시스템'을 강의합니다. 신호와 시스템의 수학적 정의에서 시작해, 푸리에 급수와 변환을 거쳐, 라플라스 변환의 유도로 끝맺는 과목입니다. 학생들은 신호처리나 통신 같은 분야에 꼭 필요한 수학적 도구들을 익히게 됩니다. 선생으로서 저는 도구 자체보다도 그걸 얻어내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지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부려 쓰는 일은 이제 사람이 인공지능을 앞서기 쉽지 않습니다. 아울러 신호와 시스템의 문제와 별 관련이 없는 분야로 가게 될 학생들을 헤아리면 결과만 강조할 순 없겠지요.

지식 창출의 논리적 과정은 건축에 견줄 수 있습니다. 공리적 토대 위에 명제를 증명하고 그걸 바탕으로 또 다른 명제를 유도해가는 흐름이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와 지붕을 올려 멋진 집을 짓는 일에 비유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공부는 논리적 구성물을 만나는 작업이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말단의 결과만 살피지 말고 논리적 건축 체계에 주목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공부는 자연스레 공부에 관한 공부를 포함합니다. 배워야 할 게 계속 새로이 등장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결과의 사용법에 집중하는 방식은 소모적이기만 할 뿐입니다.

논리적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주 부닥치는 장애물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경험입니다. '신호와 시스템'을 듣는 학생들은 사실 라플라스 변환이라는 도구가 낯설지 않습니다. 라플라스 변환을 활용해 특정한 종류의 미분방정식을 대수방정식으로 바꿔 풀어본 적이 있지요. 한데 이런 단순 경험이 라플라스 변환에 이르는 이론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외려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기둥도 없는데 지붕을 얹으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익숙함을 앎으로 착각할 때 생길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여러분이 해본 라플라스 변환은 잊으십시오. 여기선 백지 위에 새집을 그릴 것입니다. 진정한 배움(Learning)의 출발점은 의도적 비움(Unlearning)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당시엔 타당했다 하더라도, 세상이 바뀌어 맥락이 달라지면 더는 유효하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한 치 앞 내다보기도 만만찮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엔 예전의 경험이 새로운 학습을 방해하기 일쑤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더 커졌다 할밖에요. 대한민국은 위대한 시민혁명을 이뤄냈습니다. '이게 나라냐?'를 '이게 나라다!'로 바꿔낸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낡은 시대를 청산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일은 무책임한 무자격자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라 여깁니다.

시민혁명의 완수에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철 지난 옛 경험에서 자유롭고 상상력과 학습능력이 풍부한 이들이 새 정부를 세우는 주역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의도적 비움'은 사실 저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제 또래의 기성세대에게도 전해봅니다. 마치 고장 난 나침판처럼 흔들림 없이 고정된 과거의 시선이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말입니다. 학습하지 않는 자의 오래된 경험은 약이 아니라 독일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배우며 품위 있게 나이 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미래세대와 성찰적인 기성세대가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함께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봅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