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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Headshot

5월 광주, 느리게 날아오는 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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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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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쓰여진 산문 중 아름다움 측면에서 빠지지 않을 김훈의 『자전거여행』에 보면 '망월동의 봄'편이 나온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구두를 만들었고 구둣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이세영씨는 도청 앞 집단발포 당시 복부에 총알 두 발을 맞았고 척추를 못쓰게 되었다. 구둣가게 꿈은 날아갔다. 김훈이 이세영씨와 한 아래의 대화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 압축돼 있다.

"처음부터 그 사태에 대한 인식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나는 구둣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두들겨 맞고 나서, 총에 맞고 나서, 이 사태가 무슨 사태인지 알게 되었다."
"총을 쏘는 군인들을 향해 달려갈 때 무섭지 않았나?"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에, 그 무서움이 갑자기 분노로 바뀌었다. 그때 온몸이 떨렸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를 지금도 알 수 없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목발에 대해서 묻지 않는가?"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아빠는 왜 목발을 짚느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옛날에 다쳤다고 대답했다."
"군인과 총에 대해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말하지 않았다. 네 아이들이 군대 전체와 국가 권력 전체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발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구둣가게 꿈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목발 때문에 나는 세상과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한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화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심정으로는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없었다."

내가 처음 저 대화를 읽었을 때 눈물이 솟구치는 걸 참기 힘들었던 건 "총을 쏘는 군인들을 향해 달려갈 때 무섭지 않았나?"라는 김훈의 물음에 이세영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에, 그 무서움이 갑자기 분노로 바뀌었다. 그때 온몸이 떨렸다."라고 답변하는 대목이었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라.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구타하고 체포하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참다 못해 운집한 군중들이 공수부대를 향해 달려가고 공수부대가 그 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하는 장면을 말이다. 소리 보다 빨리 도착한 총탄은 시민들의 육신을 찢고 영혼을 파괴했다. 나뒹구는 시신과 아스팔트를 적시는 선혈.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군은 국가의 대표적 상징이다)가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부당하게 파괴하는 괴물이 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의 본질적 성격 중 하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국가가 그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할 때 국가는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며,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에 대한 주권자의 저항은 정당성을 확보한다. 광주민중항쟁은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와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에 대해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한 주권자가 드물게 역사에 등장한 사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광주민중항쟁이 없었다면 87년 6월 항쟁도, 87년 체제의 성립도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80년 5월 광주를 왜곡하고 능욕하는 일체의 행위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이고 모독이다.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 발사한 탄환은 지금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사태일 것이다. 우리는 그 탄환을 외면해서도, 도망가서도 안 된다. 너무나 무서웠지만 총을 쏘는 군인들을 향해 달려갔던 이세영씨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사람의 도리다.

끝으로 80년 5월 광주와 관련된 최근 소식을 전하려 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두환 前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충립 한반도프로세스포험 대표가 11일 "(5·18) 당시 중요직에 있었고 3개월 후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남은 가족을 위로하고 총체적인 유감을 뜻을 표한다"는 전 전 대통령의 입장을 5월 단체대표들에게 전달하면서, 광주 방문과 5·18 묘역 참배의 조건으로 ▲신변 안전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꼽았다'고 한다. (전두환 측근 "전 前대통령 신변보장·예우 확보되면 광주 간다")

나는 전두환 측근의 입에서 나온 '총체적 유감'이라는 단어의 내용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광주학살에 대해 전두환이 무슨 책임이 있으며 어떤 잘못이 있다는 건지에 대한 명확한 적시가 없는 '총체적 유감'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광주방문과 5.18묘역 참배의 조건으로 내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라는 대목에 이르면 화가 나기보다 웃음이 난다. 전두환은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그것도 꽃가마를 타고 하겠다는 것인데 이게 도대체 가능한 발상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가해자가)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싶다"는 이세영씨의 소망은 전두환 살아 생전에는 좀체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