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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Headshot

〈더 테이블〉을 보며 인연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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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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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을 봤다. 〈더 테이블〉은 한 카페 안의 동일한 창가 자리에 하루 동안 머문 네 쌍의 인연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는 배우들의 표정과 대사가 영화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스타배우가 된 유진(정유미 분)과 유진의 전 남자친구 창석(정준원 분)은 오전 11시에 창가자리에서 만난다. 유진은 에스프레소를 시키고 창석은 맥주를 마신다. 유진의 바람과는 달리 창석은 유진에 얽힌 가십의 진위 여부에 집착하고, 유진과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직장 동료들을 유진 몰래 데리고 나온다. 당연히 두 사람의 대화는 에스프레소와 맥주처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유진과 창석의 인연은 이미 지나갔으며, 다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룻밤 사랑을 나눈 후 황급히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경진(정은채 분)과 민호(전성우 분)의 대화는 위태롭다. 경진은 자신을 한국에 남기고 해외여행을 길게 간 민호를 이해하지 못한다. 주저하고 수줍어하다 마침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경진을 민호는 해외여행에서 사온 선물들을 보여주며 다독인다. 오해가 다 풀린 건 아닐지라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두 사람의 장래 인연은 달콤할 것이다. 두 사람이 먹은 초콜릿 무스케이크처럼.

결혼사기라는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은희(한예리 분)와 숙자(김혜옥 분)는 가짜 모녀 역할을 모의하기 위해 만난다. 은희는 사기꾼 답지 않게 사람이 좋아서(돈 때문이 아니라) 사기결혼을 하려 하고, 숙자는 은희를 보며 죽은 딸을 떠올린다. 숙자는 은희를 앞에 두고 마치 예비사돈에게 딸을 부탁하듯 곡진하게 말한다. 은희가 사기 결혼 이후에 어떻게 살지는 모른다. 다만 은희와 숙자는 적어도 카페에서 만난 짧은 순간만큼은 실제 모녀처럼 보였다.

비 오는 저녁에 만난 혜경(임수정 분)과 운철(연우진 분)은 이별을 앞두고 있다. 혜경을 감당할 수 없는 운철은 혜경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혜경은 운철을 유혹하지만, 운철은 혜경의 손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불행할 걸 알기에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그들은 비 그친 밤 카페 앞에서 헤어진다.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혜경이 마신 홍차와 운철이 마신 커피가 서로 섞이지 않듯이.

〈더 테이블〉은 이 가을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영화다. 화면은 아름답고 배우들의 연기는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더 테이블〉은 숱한 곡절과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로 점철된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면 나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쉬게 될 것이다. 지나간 인연과 다가올 인연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