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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가 컵스를 사랑한 92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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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전형적인 컵스 팬이었다. 아버지는 92년 동안 컵스를 사랑했다. 여러 해 전, 아버지가 80세였을 때 컵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자 아버지는 추억에 잠겼다.

컵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지금(우리 시카고 팬들은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라고 한다) 아버지 이야기를 공유하는 게 적절하다고 느껴졌다.

1927년, 대통령은 캘빈 쿨리지였다. 찰스 린드버그는 뉴욕에서 파리로 최초로 단독 비행을 했다. 모델 A 자동차가 등장했고 기계식 목화 수확기가 발명되었다. 내 아버지와 시카고 컵스의 사랑이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일리노이 주 윌메트에 살았던 당시 80세의 내 아버지 셸든 스턴버그는 "내가 4살 때였는데, 처음으로 컵스 경기를 보러가서 아버지 무릎에 앉았지. 핵 윌슨이 야구공에 사인을 해서 줬어."

사인 볼을 가지고 있는지 묻자 스턴버그는 "아마 사용했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핵 윌슨은 56홈런으로 내셔널 리그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록은 68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 뒤로 70년 동안 내 아버지의 인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버지는 시카고 근처 오스틴에서 자랐고, 드폴 대학교를 2년 다닌 다음 19세에 공군에 들어갔다.

세계 2차 대전에서 폭격 비행에 7번 참여하고 공군 훈장과 청동성장 4개를 받았다. 일레인 오셔위츠와 결혼했고, 장인이 창업한 베스트 코셔 소시지 공장에서 일했다. 자녀 4명, 손주 13명, 증손주 7명을 보았다.

하지만 내 아버지의 인생에서 한 가지 변함없었던 것은 컵스에 대한 사랑이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경기를 보러갔을 때 돈 카드웰이 노 히트 노 런을 기록했어. 1960년이었지. 옥외 관람석에서 봤어." 아버지의 말이다.

스턴버그 가의 자녀들은 모두 컵스에 대한 사랑을 물려받았다. 나는 눈을 감으면 아버지가 파티오에 앉아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중계를 듣는 모습이 보인다.

루 부드로, 잭 브릭하우스, 해리 캐레이[주: 컵스 해설자들]의 목소리를 아직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여름 주말의 우리의 의식이 지금도 기억 난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스코키에 있었던 지금은 없어진 리키스 델리에 제일 먼저 들렀다. 거기서 호밀 빵 큰 것을 세 개 주문했다.

"같이 먹을 콘드 비프나 파스트라미는 안 사나요?" 카운터 직원이 매주 하던 말이다.

아버지는 컵스 게임에 가져갈 샌드위치에 넣을 베스트 코셔 콘드 비프, 살라미, 볼로냐를 집에 가져왔다. 내 형제 마이클과 데이비드, 내 자매 낸시와 나는 쭉 늘어서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한 명이 빵을 자르면 다음 사람은 겨자를 바르고, 다음 사람이 고기를 넣으면 마지막 사람이 샌드위치를 잘랐다.

그리고 우리는 스무 개가 넘는 샌드위치를 들고 리글리 필드에 들어갔다. 더블헤더인 날은 더 많이 가져갔다.

여름마다 우리는 모두 베스트 코셔에서 일했다. 하지만 우리 일에서 제일 좋았던 점은 갑자기 1시에 나오라고 해서 리글리 필드에 갈 때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기를 보러갔기 때문에, 나는 어니 뱅크스, 돈 케싱어, 론 산도, 퍼기 젠킨스, 테드 애버내시의 잠수함 투구, 아돌포 필립스, 랜디 헌들리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들은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1962년에 부모님은 애리조나 주 메사의 스프링 훈련 캠프에 갔다. 찰스 그림(역자 주: 선수 출신 감독. 1960년에 컵스를 맡은 것이 마지막이었다.)이 두 분을 맞아 자리로 안내했다.

1969년에 금요일 저녁에 저녁 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내가 받았더니 아버지를 바꿔달라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LA 다저스의 모리 윌스(주: 당시 유격수)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네, 제리 삼촌(내 장난꾸러기 삼촌이다). 전 영국 여왕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정말 모리 윌스였다. 그는 L.A.에서 베스트 코셔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 해에 우리는 그의 초대를 받아 더그아웃 자리 맨 앞줄에서 경기를 보았다.

michael douglas

우리 남매들은 '고 컵스 고'라고 종이에 적어갔다.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소란이 일어, 안내원들은 우리에게 그걸 내려놓지 않으려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 친구들은 모두 내 아버지가 청력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야구 중계를 들었기 때문이다. 1975년, 나는 일요일 오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컵스가 중요한(음, 모든 경기가 다 중요했다) 더블헤더를 치르는 날이었다. 모두들 나와 함께 걸어나갈 때 아버지가 이어폰을 끼고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1984년에 아버지와 데이비드는 옥외 좌석에서 플레이오프를 관람했다. 1985년에도 짜릿한 일이 있었다. 컵스 케어 위원회에서 노스웨스턴 메모리얼 병원 기금 모집 행사에 아버지를 초대한 것이다. 위원장은 론 산토였다.

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가끔 삼진을 당한 선수를 멍청이라고 부르긴 했어도, 그건 순수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그 사랑이 어디서 온 거냐고 묻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컵스가 컵스라는 사실 때문이지.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여러 해 동안 컵스는 대단한 팀이었어." 그리곤 통계를 줄줄 읊어 나는 놀랐다.

"1929년, 1932년, 1935년, 1938년, 1945년에 월드 시리즈에 나갔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단숨에 말했다.

예전에 내 남편 빌리와 나는 짧은 여행을 갔다가 유대교 속죄일 행사에 맞춰 서둘러 돌아온 적이 있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갈 예정이었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행사는 오후 6시였고 컵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브레이브스와 붙을 예정이었다.

"아빠, 어떻게 하죠? 속죄일(주 : 유대인의 종교 절기)이잖아요. 우린 그 행사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아버지의 대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수전, 컵스를 위한 기도는 속죄일 기도란다."

PS: 아버지는 2015년 4월 9일에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하지만 자녀들과 손주, 증손주를 모두 병실에 모아놓고 개막전 경기는 함께 보았다. 아버지가 산소 마스크와 컵스 모자를 쓴 모습이 기억 난다. 긴 세월 동안 컵스에 헌신한 것에 대해 아리에타가 감사를 전하는 영상을 누군가가 찍어 보내주었다.

*본 기사는 허핑턴포스트 US의 'A 92-Year Cubs Fan And A Lifetime Of Baseball Memories'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