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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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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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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 광화문광장에서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장애/법률/의료/학계/시민사회단체(2개 연대체, 72개 단체)와 개인 연서명자들(4101명)이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는 지난 9월 22일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시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시술 의사의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표한 것에 대한 응답이자, '낙태죄' 폐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시작되었음을 널리 알리는 선포식이었다.

한국에서 형법상 '낙태죄'는 1953년부터 존재했으나 지난 50여년간 연간 20만건 이상의 임신중절시술이 별다른 법적 제재 없이 널리 이뤄져왔다. 이러한 가운데 보건복지부가 갑작스레 '낙태죄'를 소환하고 인공임신중절시술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까닭은 무엇일까? 인공임신중절 처벌을 통해 낙태율을 낮추고 합계 출산율을 제고하기 위한 것일까? 혹은, 태아의 '생명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생명존중사상을 고취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번 개정안이 정확히 어떠한 의도와 목적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이 시대착오적인 입법예고로 인해 그간 수면 아래 놓여 있던 임신중절에 대한 다양한 생각, 입장, 경험 들이 공론의 장으로 물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구조절정책과 '낙태죄'

한국정부는 1960~80년대에 '경제개발을 위한 인구억제'라는 명목으로 인공임신중절시술을 대대적으로 장려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는 저출산이 국가의 '위기'를 가져온다며 다양한 출산장려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50여년간 여성의 몸과 재생산이 한결같이 국가발전을 위해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져왔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부는 어쩌면 과거의 출산억제정책이 성공적이었다는 믿음에서 다시 한번 여성의 몸과 재생산을 정책으로 통제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출산율이 낮아진 데에는 스스로 자신의 임신과 출산을 조절하고자 했던 여성들의 욕구도 크게 작용했다. 자기 몸에 대한 여성의 인식 변화와 주체성을 간과한 채, 오직 정책 시행만으로 과거에 출산율 변화를 이뤄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산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단 정부는 임신중절시술 처벌을 통한 규제가 출산율 증가가 아닌 고위험 고비용 임신중절시술의 확산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임신중절시술의 강력 처벌이 현실화된다면, 사회경제적 자원과 의료정보에의 접근성을 지닌 일부 여성들은 해외 원정 시술 등의 방법을 통해 임신중절을 시도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여성은 공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의료진과 취약한 의료환경 속에서 위험한 임신중절시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말할 것도 없이 건강 불평등과 양극화의 문제가 악화될 것이다.

또한, 현 정부의 주요 저출산대책 중 하나인 '난임부부시술비지원사업'이 인공임신중절시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과연 일관된 원칙과 기준으로 '낙태' 문제를 접근하고, 저출산 극복 정책을 고심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연간 5만명의 난임부부들은 난임부부시술비지원사업을 통해서 체외수정을 시도하며, 시행 과정에서 체외수정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배아를 이식한다. 이 시술은 40%가 넘는 다태아 임신율(보건복지부 2015)로 이어지며, 이로 인해 많은 부부들이 2개 이상의 배아가 착상되는 경우 선택적 유산 (selective abortion)을 통해 다태아 출산을 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는 지난 8월 이 사업을 내년부터 소득제한 없이 모든 난임부부에게 지원하겠다고(9만명 대상) 발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정부 지원사업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선택적 유산과 최근 발표된 임신중절시술 처벌안이 갖는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다른 문제로, 여성의 임신, 중절, 출산에 이토록 기민하게 반응하는 정부가 왜 유산한 여성, 특히 부당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원치 않는 유산을 경험한 여성들의 문제에는 일관되게 무관심한지에 관한 재고가 요구된다. 2015년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피해자 보상'에서 유산과 불임을 경험한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상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2016년 '제주의료원 집단유산 산재승인'의 경우에도 임신 중 업무로 인하여 집단유산 또는 선천성 심장질환이 있는 아이를 낳은 여성노동자들이 결국 항소심에서 패소해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피해보상을 인정받지 못했다. 역학조사 결과 업무환경이 유산에 밀접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밝혀졌음에도 현 정부는 유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비도덕적' 고용주의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닌, '낙태죄'를 통해서 임신한 여성의 몸을 범죄화하고 있다.

선택권 vs. 생명권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임신중절을 '여성 개인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하는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의 찬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임신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의 수가 얼마나 될까? 임신한 여성이 출산과 육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를 지원하고 조력하는 조건들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는 다만 경제적 조건뿐 아니라 임신 여성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고, 여성이 출산과 육아 이후에도 한 개인으로서 하고자 하는 일(학업, 노동 등)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와 환경의 조성도 포함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임신한 십대 청소녀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도 출산 혹은 유산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들을 고려한 제도와 인식의 변화가 학교 안팎에 갖춰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임신이 곧 해당 청소녀의 퇴학 조치로 귀결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법적으로 미성년자가 아닌 성년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 수많은 대학 가운데 학생들을 위한 보육 및 수유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노동시장에서의 제약은 말할 것도 없다. 출산 장려의 주요 '타깃'으로 여겨지는 성인 기혼여성의 경우에도 잠재적 육아휴직 대상자로 분류되어 입사 밎 승진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가 여성 개인의 삶에서 제약과 차별, 불평등의 조건으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위해 임신 여성은 어떠한 판단 없이 그저 출산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나아가, '제3자' 또는 '타인'들이 한 여성의 출산 결정 여부를 규정하고, 명령하고, 비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더구나, 태아가 귀중한 생명이라면 그 생명을 돌보고 키우며 지켜내는 주체는 다름 아닌 여성, 즉 임신과 출산을 수행하고 있는 여성 당사자이다. 임신을 지속하는 경우나 임신을 중단하는 경우, 어느 쪽이든 이는 모두 임신한 여성이 태아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장애와 질병을 이유로, 혹은 법적 혼인관계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사회와 가족들로부터 낙태의 압력을 받고도 임신을 지속하는 수많은 여성이 있다. 단지 임신을 지속하고 출산했다는 이유로, 이들이 태아의 '생명권'을 위해 자신의 '선택권'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임신, 중절, 출산, 나아가 양육의 문제는 단선적이고 이분법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수많은 조건과 욕구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과 실천에 있어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임신중절시술에 관한 논쟁을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고루한 이분법적 구도에 가두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보건복지부가 이번 의료법 개정안을 발표한 직후, 다양한 여성들이 '낙태죄'에 관해 온라인 공간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모든 여성의 임신과 출산 경험이 다르듯이, 모든 여성이 임신중절시술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임신, 중절, 출산, 육아를 이야기하는 이 여성들의 발언은 단지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이들이 지닌 공유된 경험뿐 아니라, 이들의 계층적 위치, 장애, 성적 지향성, 성별 정체성, 교육경험, 노동경험, 종교적 배경 등에서 비롯된 임신, 중절, 출산, 육아에서의 수많은 '차이' 및 '차별'의 경험을 수반하고 있다.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이 비단 이 개정안이 지닌 법적 문제를 규명하는 작업뿐 아니라, 그간 침묵되었거나 사적 공간에서만 토로되었던 수많은 여성의 권리와 경험을 공론화하고 돌아보는 기회이자 계기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의 어떤 경험들이 왜 더 많이 이야기되는지, 어떠한 경험은 왜 이야기되지 않거나 주변화되는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기혼여성과 비혼여성의 임신중단 경험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의 임신중단 경험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자. 동성애자 여성과 비동성애자 여성의 임신중단 경험이 어떻게 다른지 귀를 기울여보자.

이번 의료법 개정안으로 촉발된 '낙태죄' 폐지의 요구는 모든 개인이 진정한 재생산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시작점일 뿐이다. 언제 어떻게 누구와 어떠한 방식으로 아이를 낳을 것인가 혹은 낳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이며, '낙태죄' 폐지는 이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 시급히 풀어야 할 선결과제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