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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연수'에 관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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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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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문제"에 관하여는 대다수 시민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아래는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 및 대법원에서 다뤄진 "김연수"에 관한 친일반민족행위결정취소 사건(사건번호: 2012두3934)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가 증인으로서 제출한 <진술서>의 일부입니다.

이 사건은 제1심과 제2심에서 원고(김연수 자손)가 연달아 패소하였습니다. 대법원 역시 2013년 7월 12일 자로 본 건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요컨대 사법적으로는 김연수의 유죄로 이미 결론이 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사법부와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가운데는 제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반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친일파 청산"에 관심이 깊으신 분들은, 시간이 되시는 대로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백승종의 증인 진술서 (증인의 약력 등 생략)


1. 증인은 국내외에서 한국학연구에 종사해왔습니다. 한국근현대사 분야도 증인의 연구 대상입니까.

저는 독일의 튀빙겐대학교, 베를린자유대학교 및 보훔대학교 재직시절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하고 강의하였습니다. 서강대학교에서 재직하던 시절에도 학부 및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및 한국근현대사를 지도하였습니다. 제 책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은 일제시기 농촌지식인 이찬갑의 고뇌를 연구한 것입니다.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은 6.25전쟁 직후의 북한사정을 알려주는 사진자료를 발굴, 소개한 책자입니다. 또한 <아버지 난 누구예요>는 서강대학교 학생들을 지도하여 그들 나름으로 현대사를 쓰게 한 결과물입니다. 은사 이기백 선생이 강조하셨듯이 모든 역사가는 자신의 전공에 관계없이 또한 현대사가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역사가는 결코 현실을 외면할 수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2. 증인은 이른바 좌파신문이라고 하는 '한겨레신문'에 5년째 매주 역사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로 증인은 "좌파 진영"의 역사가입니다. 그런 증인이 친일파로 낙인찍힌 망인(김연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와 <조선의 통치철학>의 연구에 망인이 설립한 하서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하서재단의 연구지원을 받은 일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 일과 망인에 대한 제 관심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망인과 같은 역사적 인물의 업적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망인이 걸어간 길은 한국근현대사의 고뇌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알다시피 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미시사(microhistory) 연구에 매달려왔습니다. 국가와 민족 중심의 거시사(macro history)가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제 입장에서 망인에 대한 재판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족합니다. 한 개인의 삶을 국가/민족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가령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런 재판은 그 자체가 국가권력이 개인을 상대로 저지르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증인의 주장은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저는 이른바 '뉴 라이트' 계열의 학자들과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릅니다. 이른바 보수 우파는 물론 뉴 라이트나 이른바 진보적 좌파라는 역사가들과도 다릅니다. 방금 말씀드린 그들 학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지나치게 국가/민족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는 역사적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이 국가/민족의 이익입니다. 그들은 근대민족국가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국가/민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19세기의 '내셔널리즘'이란 낡은 이념에 따른 판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망인이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에는 현실적으로 망인 같은 한국인을 보호해줄 한국이란 국가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민족이란 개념은 존재하였지만, 그 역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다면적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국가를 상실한 한국민족이 현실적으로 그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보호나 강제를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망인을 포함하여 그 시대의 대다수 한국인들은, 한민족이란 관념을 공유했습니다. 그러한 민족적 감정이 그들의 역사적 선택과 결단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때로 상당한 불이익을 자발적으로 감수하였습니다. 망인과 망인의 형 김성수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한국이란 국가도 한국민족이란 관념의 공동체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에게 부담과 짐이 될 때가 많았던 한국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 개인이 단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족정기를 살린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여러 개인의 명예가 함부로 실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못한 곳에서조차 일방적인 의무만이 강제될 수 있는 것일까요. 망인처럼 삶의 전 과정에 걸쳐서 사실은 민족/국가적 이익을 위해 다방면(교육, 사회, 기업, 문화 등)의 노력을 기울인 경우조차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뒤늦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망인의 일생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으로 폄하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4. 망인은 친일행위를 통해 막대한 기업이익을 냈다는 것이 해당 위원회의 결론입니다. 망인이 자발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봅니까. 이윤을 얻기 위해 망인이 자발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보는 견해를 증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순수하게 논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말해, 망인은 1920년대 초반부터 기업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1937년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친일반민족'의 혐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극히 논리적인 물음을 가지게 됩니다. 1937년 이후 망인에게 이른바 친일의 혐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발적, 주도적 친일행위였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상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당위원회와 법정이 망인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하여 판단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망인이 과연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망인의 '친일행적'을 입증하려는 그간의 노력은 유감스럽게도 충분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가설이 우선 검토되어야 합니다. 가령 망인이 친일행위를 거부하였을 경우 정상적 기업 활동이 불가능하였다면, 그의 친일행위를 자발적 친일행위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가인 망인으로서는 국가도 유지하지 못하는 관념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사업을 반드시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망인이 자신의 직업인 기업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비유컨대 일제에 곡식을 공출 당하는 것이 친일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업을 그만둔 농민이 있었다면, 그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아 마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농부가 계속 농업에 종사했다고 하여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점은 종사하는 직업이 공업이든 상업 또는 교육이나 기업 활동이라 해서 달라질 이유가 없다고 믿습니다.



5. 증인은 규탄 받아 마땅한 친일행위란 일제시기에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그런 주장입니까.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친일행위가 있기는 하였습니다. 반인륜적 행위가 그에 해당합니다. 인권을 유린하고 나아가 침략전쟁을 직접 수행한 행위는 누가 보아도 범법행위였습니다. 그에 관하여는 마땅히 사법적 처리가 뒤따랐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반국가 또는 반민족의 이름으로 단죄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을 규탄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념과잉이 빚은 감정적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민족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관념적인 공동체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이 한민족의 전부를 포괄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국가가 단 하나의 민족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닙니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어떤 행위를 미화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부합되지 못하며, 바람직한 미래상도 결코 아닙니다.




6. 망인은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포장을 받았습니다. 해당 위원회와 법정에서는 그런 사실들이 모두 망인의 친일행위를 증명한다고 봅니다. 증인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훈포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망인이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하였을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가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뿐입니다. 훈포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함부로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으로 망인의 훈포장 관련 사실을 검토해보았습니다. 피고는 훈포장 사례를 가지고 망인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실체적 진실의 광맥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하지만 훈포장에 관한 기록을 엄밀하게 따져 보면, 피고가 내린 결론이 부정될 수 있습니다.

우선 피고는 1915년 망인이 조선총독부에 도로부지와 용지를 기부한 대가로 목배(木杯)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친일반민족행위와 무관한 것입니다. 총독부체제 하에서 저들은 도로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으레 유지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망인은 당시 십대 청소년으로 일본에 유학중이었습니다. 목배는 망인의 친일행위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이런 훈포장조차도 1937년까지는 망인에게 다시 주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피고는 오히려 이런 사실에 주목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다가 1937년부터 망인이 총독부에 기부한 횟수와 금액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것은 물론 모두 중일전쟁 발발이후의 전쟁분위기, 즉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937년 총독부가 산업장려관을 만들면서 신축비를 모금하자, 망인은 1천원을 기부했습니다. 기부금의 성격상 '친일반민족행위'로까지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1942년에는 공립심상소학교를 신축할 때 망인은 1천원을 기부했고, 그로 인해 포상(褒賞)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 역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아동들이 다닐 공립학교 건설에 약간 금액을 기부한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1939년 조선총독부가 박물관을 건설할 때도 망인은 1만원을 기부했고, 그 바람에 '감수포장(紺綬襃章) 식판(飾版)'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친일반민족행위로 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또 1943년 망인은 방적공업의 선구자로 인정받아 녹수포장(綠綬襃章)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친일반민족행위'라고 강변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1937년 이후 망인이 총독부에 기부금을 내게 된 자체가 반드시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일반 시민들조차 가지각색의 명목으로 총독부에 돈을 뜯겼습니다.

만일 망인에게 문제되는 행위가 있었다면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1944년 망인이 징병제 실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군 조선참모장이 감사장(感謝狀)을 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장' 하나를 가지고 망인에게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심한 과장이고 비학문적 태도입니다. 또 하나 남은 문제는 1940년 망인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3만원을 기부했다고 하여 감수포장을 받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망인이 과연 총독부에 거액의 기부금을 바친 것이 자발적인 결정인지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48년 특별재판소에 망인이 참고자료로 제출한 서류 가운데 총독부의 협박장이 있었고, 이를 입증하는 각종 진술이 존재하였습니다.

요컨대 망인의 훈포장 수여사실은 표면상으로는 마치 중요한 범죄행위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반드시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억지춘향이나 다름없이 훈포장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망인이 특별재판정에서 그 점을 일일이 진술하지 않았다고 해서 피고가 대단한 위증혐의라도 확보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입증되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특별재판소의 재판기록과 판결자체를 조사대상에서 간단히 배제하는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7. 망인의 친일반민족 행적을 논하면서 피고는 일제에 많은 성금/헌금 및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을 거론하였습니다. 증인은 이 문제를 검토해 보았습니까.

그 내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현행법은 일정금액 이상을 기증했을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법의 취지를 고려할 때 금액만 가지고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생각됩니다. 재산규모에 따라 기부금액이 갖는 의미는 달라져야 옳습니다. 망인과 같은 굴지의 재산가의 10만원과 일반인의 10만원은 비중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부금의 성격도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망인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부한 적이 있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습니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사실상 식민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성금/헌금 따위를 강요하였습니다. 농부와 학생들까지도 헌납을 강요당하였습니다.

지위에 관계 없이 조선인에게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생산과 소비도 완전히 저들의 통제 아래 놓였기 때문에 특별세와 이른바 헌납마저 저들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조선총독부는 "1944년 2월부터 '농업책임생산제'를 실시하여 쌀, 보리 등 주곡은 물론 축산물까지 목표량을 생산토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각 부, 군, 읍, 면, 부락 단위로 세분, 각 개인에게 책임량을 돌렸다."고 하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저들이 임의로 정한 "책임생산제는 농축산물 분야에만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는 1944년3월부터 광산과 공장에 대해서도 이를 적용하고, 육, 해군 후원 아래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광산연맹, 각 도 광산연맹 등과 공동으로 중요 광물생산 책임 완수 총궐기운동을 벌이며 군수물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으로 통합니다.

심지어 조선 "총독부는 전쟁에 가장 필요한 전투기를 마련하기 위해 각 군마다 1개 비행기를 바치게 하는 이른바 일군 일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여 돈을 거두었다."는 것이 '전시총동원체제'의 실상이었습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조선총독 "고이소는 통치비용도 조선인에게 부담시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41년 조선인들로부터 군사비특별회계 조입금이라는 명목으로 9,456만 8천 엔의 세금을 받은데 이어 1942년 ...엔을 거둬들였다." 이것이 당시의 실정입니다.

심지어 조선 총독 "고이소는 모자란 군비를 충당하고자 저축도 강요했다."고 하였습니다. "고이소는 자원동원으로 말미암은 불만을 줄이기 위해 황민화 구호 아래 조선인들에게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절제 생활을 강요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악질적인 총독 "고이소는 민족저항운동 단속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심지어 해외 단파방송을 듣는 것조차 처벌했다."는 것이 당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과연 무슨 근거로 망인이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상의 인용문은 정일성, <<인물로 본 일제 조선지배 40년. 1906-1945>>, 384-390쪽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망인과 같은 기업가에게 저들이 거액을 요구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자발성과 적극성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추측이요 하나의 가정에 그칠 뿐입니다. 사인이 중대할수록 법의 적용은 더욱 엄격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망인이 일제 및 일본인을 위해 자발적인 성금/헌금을 한 적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금액은 얼마나 되는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망인이 한국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기부금을 낸 일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사해보자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충격적입니다. 특별재판소의 판결문에서도 망인이 교육(중앙중학교 보성전문에 대한 출연과 그 외 학교에 대한 기부 등), 재해규휼, 체육보급, 종업원복지증진을 통한 사회사업, 양영회 등을 통한 장학사업 등 사회방면에 끼친 공적을 인정하였습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해 보면 일제시기부터 1949년까지 망인이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위해 현금으로 지원한 금액이 무려 1천만 원을 초과합니다. 그에 비해 망인이 일제에 헌금 또는 성금 명목으로 준 돈은 1-2십 만원에 불과합니다. 금액의 다과만 놓고 본다면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진상규명법 제2조 제14호에 따라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위하여 10만 원 이상의 금품을 헌납하였으므로 망인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조사한 결과, 망인은 강요성이 전혀 없는 성금 따위를 일본인 개인이나 단체에 제공한 적이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여 한국인을 위해서는 수백만 원 씩이나 쾌척하였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도 체면에 구애되어 마지못해 기부한 경우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정치권력을 배경으로 한 사실상의 강요 또는 강탈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그럴만한 강제력을 제도적으로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을 위한 망인의 기부에도 모종의 경제적 동기가 작용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강요된 것으로까지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일제에 망인이 협력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8. 친일의 대가로 망인이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망인은 오직 일신상의 영달을 위해 일제와 협력했고, 과연 그 대가로 높은 관직도 얻었고, 사업상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인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틀림없는 없는 셈입니다. 증인도 그렇게 판단합니까.

망인의 모든 행위를 친일이냐 또는 민족을 위한 노력과 희생이냐, 하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동인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필 그것을 국가/민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이고 사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망인에게는 기업가로서 자신의 활동자체가 중요하기도 하였을 테고, 그 가문과 시대의 영향으로 애국애족적인 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자신의 개인적 취향이나 자녀의 장래를 위한 배려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을 것은 물론입니다. 이른바 친일행위라는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강요되었다고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시금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망인이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갑자기 친일적인 행적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객관 타당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아무래도 그것이 강요된 친일행위라고 판단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전시총동원체제'가 얼마나 혹독했는가에 관하여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3의 자료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시총동원체제'의 폭력성을 입증하는 진술/기록은 흔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은 망인에게 하필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만 친일행적이 나타나는 이유를 내적 변화라기보다는 외적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 시기는 망인에게도 가혹한 시기였다는 판단인 것입니다.




9. 증인은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법률을 부분적으로만 찬성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증인의 호오(好惡)와 무관하게 실정법입니다. 증인의 학문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이 법에 따라 망인에게는 범법행위가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학계 일각의 주장이요, 법원의 지금까지 판단입니다. 망인의 유죄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현재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특별법은 그 효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1세기는 이 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린 바지만 더 이상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을 단죄할 수 없는 시대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더욱이 며칠 전 우연히 읽은 신문기사(문화일보 2012년 4월 13일자)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과거사 규명작업이 사실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일종의 정략적인 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주장이 확고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망인의 후손들을 비롯한 기득권세력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으로 낙인찍는 행위는 현실정치에서 이용가치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언제나 역사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들의 뜻대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서도 다각적인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역사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단견입니다.

저는 이른바 망인의 친일행적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파든 "뉴 라이트"든 좌파든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에 관해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협의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만, 역사는 연구를 통해 밝힐 일입니다.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이미 사망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법률적 판단까지 내리는 작업은 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망인의 활동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연구대상입니다. 역사가들의 활발한 토론에 맡길 일이지, 법을 적용하여 왈가불가할 사안은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10. 그러나 후세에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법의 취지입니다. 망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정의 판결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대적 사정을 일일이 고려하게 될 것 같으면 이 법에 저촉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없어진다. 그러면 후세에 비슷한 문제가 또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위험천만하다는 것입니다. 법적 판단은 개인의 행적에 심각한 잘못이 있다는 뚜렷한 증거를 전제로 삼아야 것입니다. 설사 명백한 범죄행위가 있다 하여도 민족/국가의 후세 역사를 위해 그들 개인의 명예를 함부로 희생하여서도 안 됩니다. 더욱이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같이 중대한 범죄행위의 책임을 명백한 증거도 없이 개인에게 들씌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망인은 이미 사망한 지 오래입니다. 그는 현행법의 적용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할 아무런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법의 적용은 더욱 신중해져야 할 것입니다.




11. 증인은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제의 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해 많은 친일행위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고가 지적하는 망인의 '친일행위'에서도 자발성과 주도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망인에게 당연히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전시총동원체제'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각급학교는 사실상 휴교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학생들마저 매일같이 강제노동에 징발되었습니다. 자유언론도 완전히 마비상태였습니다.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은 1940년대 초반에 모두 폐간되고 맙니다. 징용과 징병은 일상사가 되었고, 심지어 종군위안부까지 양산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망인이 거액의 성금/헌금을 냈고, 동원된 행사에 참여한 것을 문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날마다 학생들에게 '진충보국'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교사들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것입니까.

이른바 진보진영의 대표적 인물인 리영희 선생조차도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학생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였던가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였습니다. 웬만해서는 일제의 강압을 이길 방법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전략)전쟁 시기에는 (중략) 온통 군대식이 되어버렸어. 그때에는 조선인 고등교육의 경우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연희전문(해방 후의 연희대학, 그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합병해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됨)은 '공업경영전문학교'로 그리고 일본인들은 무슨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이화여전(이화여대)과 숙명여전(숙명여대)은 망측하게도 '농업지도원 양성소'로 이름을 바꿨어. 그렇게 해서 조선인 고등교육의 기능을 박탈해버린 거지. 그래서 학생들의 호연지기라는 것도 전쟁기에는 찾아볼 수 없게 돼요."
(리영희, 임헌영,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대화>>, 한길사, 2005, 55)

"학교의 수업은 3학년 말로 사실상 중단되고, 4학년부터는 '전시학도 동원령'으로 아예 군관계의 노동에 징발되어 나날을 보내게 됐어. 전 조선의 중학교 3학년 이상은 그 뒤 다시는 학교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1945년 8월15일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온갖 종류의 노동으로 날을 보냈지. 비행장 건설, 포탄 또는 소총탄 깎기, 군수용품 만들기, 미군 폭격에 대비한 서울의 초가집 소개(화재에 연소되지 않게 하기 위해 주로 가난한 조선인의 초가집들을 몽땅 헐어서 경성 시내 여기저기에 빈 지역을 만드는 것)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어요. 이때에 소개된 것이 지금의 아현동, 공덕동, 마포, 중림동, 청량리, 왕십리 등으로, 가난한 조선인들의 거주지였어. 전쟁 말기에 집이 헐린 조선인들의 생활이란 비참했지."
(리영희, 임헌영,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대화>>, 2005, 59)




12. 증인은 모두가 한 시대의 희생양이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인의 독립과 안위를 지켜 줄 국가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도리어 국가를 탓하는 꼴입니다. 그럼 이런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은 바보였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희생과 죽음은 과연 누가 보상해야 합니까. 증인과 같은 논리를 택한다면 친일파의 척결은 완전히 불가능 한 일이 아닙니까.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라고 저는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사안에 따라 실상은 조금씩 달랐을 것입니다.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일어난 불행한 일들은 개인의 책임으로 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일제로부터 높은 감투를 얻어 썼다 해도 그것이 해당인물이 꼭 감투를 좋아해서 기꺼이 한 일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일이든 개인이 압박을 견디지 못해, 마지못해 한 일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해당 인물을 흉악한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마구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망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문제가 되어 있는 중추원의관 따위의 관직이 그랬습니다. 중추원에서 망인이 한 역할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서로 답한 적이 두 번 정도 인데 그나마도 한국인의 처우개선에 관한 질의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런 관직활동을 가지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부당합니다.

'전시총동원체제'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에 나선 분들도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들입니다. 여간해서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기 때문에, 저로서도 무척 존경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악질친일파 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속한 역사공동체의 존립에 심각한 타격을 준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그들은 반인륜적 범법행위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연구조사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 연구에 미비점이 있다면 서둘러 법률로 단죄할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한 연구가 최우선이자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13. 증인은 단순한 "친일행위자"와 "반민족행위자"는 서로 구별될 수가 있다고 봅니까. 친일행위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했다고 믿습니까.

친일의 개념이 더욱 세분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어를 무어라 정하든지 간에 "협일", "친일", "부일" 등 여러 단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친일"이면 "반민족"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의 주요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본, 중국, 미국 등 많은 나라와 한국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친미", "친중", "친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친일"이란 용어도 나쁜 개념으로만 간주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가령 일본사람이 "친한"인 것은 좋지만 한국 사람은 "친일"하면 "반민족"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식민지기간에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매사에 "반일"적이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와의 관계, 즉 식민지 지배권력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망인은 1920년대 초부터 제도권 안에서 각종 사업을 하였습니다. 식민지 지배권력과 표면적으로 적절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직업상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의 한국인들은 대개가 식민지 지배권력과 노골적으로 대립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식민지 당국와 한국인들의 관계는 "친일", "협일", "부일"등으로 당야하게 나뉘었습니다. 이것은 당사자들의 세계관과 입장 차이에 따라 결정될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더욱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을 대하는 식민지 지배권력의 태도였다고 봅니다. 한국인과 식민지 지배권력은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지 권력은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비할 수 없이 강압적이었습니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는 그 폭력성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한국의 해방1세대 역사학자들은 이 문제의 근본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이기백(<한국사신론>), 한우근(<한국통사>) 선생 등은 망인을 비롯하여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친일을 강요당한 인사들을 친일파 또는 민족반역사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었습니다. 해방 후의 반민족특위의 검사와 재판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진보적 국회의원들을 대표하는 조봉암 선생 등도 그러하였습니다.

감히 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여러 학자들에게 저는 방향전환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친일", "협일" 또는 "부일"의 문제를 아울러 깊이 연구 조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치 문제를 연구하는 독일 뮌헨의 '현대사연구소'도 나치주의자들만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반 나치주의자들의 활동도 연구합니다. 그들의 역사연구에서는 국가/민족주의(내셔널리즘)의 시각이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점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망인에 관한 위원회의 조사결과나 법정의 1. 2심 재판은 모두 국가/민족주의의 관점에서 평가된 것입니다. 이처럼 특정이념에 따라 망인의 범죄사실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14. 증인은 망인의 행적을 탈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증인과 같은 관점이 국내 학계에도 존재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런 흐름이 존재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세계사적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국문학자들 가운데는 특히 저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뒤늦게나마 친일이 곧 민족배신행위라는 주장의 위험성을 인식한 학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 현상에 대한 통찰을 위해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한 인식의 단초는 사실 진즉부터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일제 지배권력이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한국인의 완벽한 일본화를 바라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인의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본화 된다는 미래상은 엄청난 혼란이며 자국민의 불이익을 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억지로 강요한 창씨개명 따위는 하나의 형식적인 조치였습니다. 이런 점들은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선일체'와 '황민화', '징병제' 찬성 발언을 하였던 한국인들 역시 한국인의 이익에 반대되는 반민족행위를 하였다고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제에 협력함으로써 그들은 일본제국의 구도 안에서 한국인의 지위상승을 바랐다고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통치행위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자치능력이 함양되기를 바랐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주장 같지만 그 속내는 다를 수가 있었습니다. 강압적인 식민통치가 강요되던 시기, 한국의 지도층이 보인 "반민족적 행위"를 제대로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깊은 뜻은 영영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 몇 가지만 가지고 "친일반민족행위"여부를 단정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15. 끝으로, 한 번 더 묻습니다. 증인은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망인이 식민지 당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사실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은데, 사실입니까.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신용하 선생 같은 분들도 '전시총동원체제'의 폭력성을 철저히 파헤친 적이 있습니다. 주제를 몇 가지로 분류하여 필요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래 인용문은 신용하의 <<일제 식민지 정책과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문학과지성사, 2006, 406-411쪽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가. 일제는 한국인 지도층의 학살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제7대 총독 남차랑이 취임하자 식민지 통치에 군사 특무대의 점령지 정보통치방식을 도입하여 독립의식 또는 민족의식을 가진 한국민족 간부급 인사들을 정보망으로 일거수일투족 철저히 감시하고, 일제 침략전쟁 선전에 강제 동원하며, 필요하면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학살'할 체제를 만들려고 하였다."

나. 일제는 한국인 지도층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일반 한국인 유지와 명성 있는 인사들에 대해 신변, 주변, 가정, 교우, 자산, 약점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수집하여 정리해서 침략전쟁과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민족 가운데 주위에 영향력을 가진 유지들을 모두 일제의 정보망이 철저히 파악하여 일제의 침략전쟁, 식민지 정책, 선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활동은 철저히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다. 한국인 지도층은 어쩔 수 없이 선전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정보정치 공작 탄압에 의하여 한국의 명사들이 일제의 '중, 일전쟁' 도발, 중국침략의 정당성 선전에 총동원되었다."

라. 일제의 공작정치로 한국인 지도층은 민중의 신뢰를 잃었다: "'강연회'와 '시국간담회'는 청중에 대한 효과보다도 지조를 지키던 한국민족 명사와 유지들을 대중 앞에서 '친일적 인사' '친일파'로 인식케 하여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도록 분리시키고, 결국 한국민족을 간부가 없는 민족으로 만드는 정보정치 공작의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종래 민족적 지조를 지키며 살던 명사들도 그들의 그물망에 한 번 걸려들면 벗어나지 못하고 친일 논설, 친일 강연, 친일 작품을 강요당하여 지조를 잃고 민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요컨대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망인이 명예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이유로 그에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심히 적합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피고와 제1, 2심 법정은 망인의 행적에 관하여 조사가 불충분하였고, 판정 또한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하 다른 증인들에 관한 제 논평은 생략)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