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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 노무현의 죽음과 비판적 지지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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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이 있다. "문빠"라 불리는 열성 지지자들이 문 대통령에게 보내는 맹신에 가까운 지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연예인처럼 정치인을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 낯선 풍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소위 정치 전문가들은 정치인은 비판의 대상이지 맹신의 대상일 수 없다고 말하며 문빠들을 꾸짖는다. 한 일간지는 그 현상을 "홍위병"에 비유하며 "문 대통령의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반지성주의적 자세라고 비난했다. 문빠 현상이 사회 전반의 주목을 받으면서 "문위병", "문슬림", "문베충"과 같은, 문재인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신조어가 양산되기도 했다.


노무현의 죽음에서 문빠의 연원을 찾는다.


문빠 현상을 올바로 평가하자면 그 연원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다. 시중에 널리 회자되는, 문빠 현상에 대한 설명도 노무현의 죽음에서 문빠의 연원을 찾는다. 그 설명에 따르자면 노무현 지지자들이 과거 노무현이 죽음으로 내몰릴 때 그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혹은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런 부채의식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문빠 현상에 대한 이런 설명은 그에 부정적인 정치 전문가들의 시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 설명에서 문빠 현상이란 본질적으로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비롯한 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의 집단적 피해망상이 발현된 것이고, 이는 문빠 현상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정당성 혹은 합리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이 '개떼'처럼 문재인을 감싸고 도는 것이 문빠 현상의 본질이고, 거기엔 어떤 지성도 합리성도 민주적 시민의 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문빠 현상에 대한 아주 그릇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 봄 검찰 수사 당시 홈페이지를 폐쇄하며 노무현이 남겼던 말을 되새겨 보자. "더 이상 저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말 속엔 때론 길거리에서, 때론 재판정에서, 때론 국회에서 노무현 자신이 일생을 바쳐 지켜왔던 가치들("민주주의", "진보", "정의")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짐이 되고 있다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이 담겨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처럼 삶이 비극적인 순간이 있을까? 그렇게 노무현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노무현을 버리라고 절규했고, 끝내 노무현 자신마저 노무현을 버렸다. 홈페이지를 폐쇄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기 내내 노무현은 결코 인기 있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지지율이 30%를 넘겨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보수진영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지지 기반이 되길 바랐던 진보진영에서도 그의 정책, 전략적 오류, 실언 등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런 기조 덕분에 2007년 이명박은 낙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검찰, 국정원과 같은 권력기관은 정권의 시녀가 되었고, 방송은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했으며, 각종 부패와 추문이 쉴새 없이 터졌지만 제대로 된 조사와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이 바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촛불 시위, 그리고 박근혜 파면이었다. 박근혜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만 두고 보면 한국 정치는 다시 10년 전으로 회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10년의 경험이 완전히 헛되지만은 않은 것이 우리는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시민 사회에서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정치인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지키는 비판적 지지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오랫동안 한국의 시민 사회에서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정치인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지키는 비판적 지지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그에 대한 맹목적 지지와 대비되며, 민주 시민의 덕목, 지성인의 징표로 여겨졌다. 특히 이런 경향은 이념적 스팩트럼이 넓은 진보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그렇게 김대중에 대한 지지도 노무현에 대한 지지도 늘 "지지는 하지만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는 비판적 지지의 모습을 띠었다. 이런 비판적 지지의 전통에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는데, 정치 권력이란 시민들의 견제 없이는 부패하기 마련이기에 정치 발전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설사 어떤 정치인을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정치인을 정당한 비판으로부터 면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 지지의 관점은 칼 포퍼(Karl Popper)가 제시한 "열린 사회(open society)"의 이상을 실천적으로 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포퍼는 과학의 진보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치의 진보에 응용하며 열린 사회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는 과학자들이 기존의 지배적 이론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취될 수 있었다. 포퍼는 정치의 진보 역시 시민들이 정치권력을 자유롭게 비판할 때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포퍼는 그런 자유로운 비판을 막는 세력이 역사 속에서 맹위를 떨쳤다고 보고, 그들을 열린 사회의 적,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노무현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진보 진영과 언론은 이런 포퍼적 관점에 따라 이라크 파병 결정, 한미 FTA와 같은 여러 정책에 있어 보수 진영만큼, 아니 보수진영보다 더 신랄하게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는 고립되었고, 정치적 우군을 잃어갔다.

지난 10년 간의 정치적 퇴보를 목격한 문재인 지자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한 이런 포퍼적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판적 지지"라는 한국 시민 사회의 전통적인 문법을 거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 지점에 나는 문 대통령에 대한 문빠의 지지를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철학을 통해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현대 과학철학계의 양대 산맥인 포퍼와 쿤은 과학의 진보에 대해 매우 다른 그림을 제시하였다. 포퍼는 과학적 활동에서 기존의 지배적 이론을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혹독한 노력을 강조한 반면 쿤은 과학자들이 "정상 과학(normal science)" 시기 동안 기존의 지배적 이론의 불완전성을 용인하고, 나아가 그런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지지하는 모습을 강조하였다(여기서 정상 과학이란 과학자들이 지배적 이론-쿤의 용어를 사용하면 "패러다임(paradigm)"-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을 핵심 과업으로 삼는 과학 활동이다). 과학 이론을 수용하면서 과학자들은 그 이론에 오점이 전혀 없는 것을, 그것이 모든 현상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쿤은 역설한다. 그 이론이 장래에 성공적 이론으로 성장할 희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과학자들에겐 그것을 수용할 이유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성공을 실현하는 것은 상당 부분 과학자 자신들의 몫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문빠들은 한국 시민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비판적 지지의 전통과 결별하였다.


나는 문빠들이 정치에 관한 포퍼의 관점에 대한 대안으로 쿤의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본다. 쿤의 관점을 받아들여 그들은 문재인 정부가 장래에 사회를 더 민주적이게, 더 공정하게, 더 정의롭게 만들어 나갈 희망이 있는 한 자신들의 지지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문빠들은 문재인 정부가 오점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모든 정책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추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실수나 오류를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에 대하여 정당하게 제기될 수 있을 법한 비판도 곧잘 무시한다. 나아가 그들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 많은 부분 자기 자신들의 몫이라 인식하며 문재인 정부를 야당과 주류 언론의 비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여론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분명 이것은 문재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 보기 힘들다. 이렇게 문빠들은 한국 시민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비판적 지지의 전통과 결별하였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경오'로 대표되는 진보 언론과 문빠들 사이의 갈등 저변에는 정치에 대한 포퍼적 시각과 쿤적 시각의 충돌이 있다. 한경오는 문재인 정부를 하나의 정치권력을 보며 그것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포퍼적 시각에 충실한 반면 문빠들은 쿤적인 시각에서 그것을 거부한다. 문 대통령에 대한 문빠의 지지가 비판적 지지와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일부 언론에서 말하듯 그것을 맹목적, 광신도적 지지라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쿤이 지배적 패러다임이 지속적으로 실패할 경우 정상 과학 시기의 과학자들이 점차 그 패러다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문빠들 역시 문재인 정부가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희망을 저버릴 경우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빠들의 문재인 지지는 비판적 지지도 아니면서 동시에 맹목적 지지도 아닌, 정상 과학 시기 과학자들이 지배적 패러다임에 보내는 지지와 흡사한 "전략적 지지"라 볼 수 있다.

문빠 현상이 노무현에 대한 집단적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홍위병 정치", "문민 독재", "반지성주의"라고 비판하는 소위 정치 전문가들은 그 현상에 대한 진단에 있어서도 대응에 있어서도 모두 틀렸다. 문빠들은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마땅히 이끌어내야 할 교훈, 즉 비판적 지지의 신화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냈다. 노무현 정부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며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노무현 정부의 소소한 실수나 한계를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가 보수 언론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을 때 정치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답시고 뒷짐 지고 있던 비판적 지지 세력은 노무현 정부에 적대적인 보수 세력만큼, 아니 그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절감한 것이다 (참고 글 : "유시민이 옳다"). 그렇게 그들은 정치에 대한 포퍼적인 관점을 뒤로하고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 지지가 아닌 전략적 지지를 보내고 있고, 그러한 그들의 지지는 토마스 쿤의 철학에 의해 능히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주류 언론은 일관되게 문빠들을 광기에 찬 '개떼'들로 매도하고 있지만 나는 반대로 그들이 한층 성숙한 민주적 시민상을 실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다소 공격적인 의견 표출로 일부 불미스러운 잔물결이 있었고 그것을 주류 언론이나 야당이 트집 잡고 있긴 하지만 큰 물결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무수한 질문들이 제기될 법하다. 포퍼식의 비판적 지지에서 쿤식의 전략적 지지로 전이되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 쿤식의 전략적 지지에서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부적절한가? 박사모 역시 박근혜를 전략적으로 지지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박사모의 행태 역시 정당화하는 것 아닌가? 아쉽게도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짧다.


* 본 글은 교수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