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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대통령이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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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본을 둘러싼 권력 게임

정치적 자본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조지 부시 2세가 재선에 당선된 이후, "미국 국민은 자신에게 새로운 정치자본을 선물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한국처럼 5년제 단임 대통령제에서 이 자본이 가장 높아지는 것은 취임 직후다. 쇠뿔도 당김에 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임기 동안 '최우선'으로 '반드시' 해야 할 핵심 아젠다의 달성 여부는 이 기간 동안에 좌우된다. 흔히 정치적 허니문으로 알려진 기간이기 때문에 '반대'와 '비판'도 상대적으로 적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 아직은 뜨겁기 때문에 '호의적인 여론'도 강하다. 그래서 이 기간을 잘 활용하면 성공한 정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이점에서 참혹하게 실패한 경우다.

차기 정부가 출범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선거 기간이 비교적 짧고 상대적으로 잘 준비된 후보와 그렇지 않은 후보가 경쟁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자칫 정책이 아닌 네가티브로 흘러갈 우려도 줄어드는 것 같다. 무엇보다 촛불을 든 많은 국민은 제대로 된 변화를 보고자 한다. 그러나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도 크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임기 초반의 높은 지지가 후반기로 갈수록 냉소와 저주로 연결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연 노무현은 무엇에 실패한 것일까? 많은 요인이 있지만 '대북송금,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부동산 과열' 등이 대표적이다. 결국,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에 속하는 '걱정 없이 제대로 먹고 사는 문제'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노무현이 실패한 지점들

대북송금 문제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처리할 문제였다. 일단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신뢰를 흔들 생각이 아니라면 정치적인 부담을 감당하는 게 옳았다. 김대중 정부가 상대적으로 덜 비난을 받는 것은 '남북문제'에 있어 확고한 원칙과 행동이 뒷받침 되었다는 데 있다. 최소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정치꾼과 다르게 넘지 않아야 할 정도(定道)라는 게 있다. 닉슨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씨의 경우 다수 국민의 경멸을 받는 것도 이 지점과 관련이 있다. 닉슨은 자신이 탄핵되던 1973년 미국의 국가이익을 우선 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탄핵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칫 지루한 정치적 공방이 이어질 경우 국론은 분열되고 미국은 더욱 수렁으로 빠질 것을 우려했다. 박근혜는 전혀 달랐다. 끝까지 자신의 입장, 자신의 정의로움, 자신의 억울함만을 내세웠다. 원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군대 경험도 없고, 회사를 운영해 본 경험도, 자신이 머리가 되어 수족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생사고락을 직접 고민해 보지도 않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미FTA와 이라크 파병 역시 자신의 정치적 '역린'을 건드린 일이다.

2017년 현재 한국이 갖는 미국에 대한 집단적 인식, 태도와 정서는 크게 봤을 때 '사대주의'에 속한다. 나보다 힘도 세고, 똑똑하고, 더 예의가 바른 강자를 모방하고 살면 큰 손해가 없다는 관점이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감안했을 때 사대주의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괜히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콜 가다피는 그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들과 달리 카타르와 바레인 등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경우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등도 미국을 섬김으로써 한편으로는 안전을 보장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누리는 경우다. 물론 자존심은 좀 상할 때가 있고, 주체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그래도 하와이나 파나마처럼 아예 국가가 없거나 통화조차도 미국 달러를 쓰는 것보다는 낫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는 당연히 일본에도 있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사대주의를 알고 있으면서 조심하는 것과 이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맹목이 되는 것은 다르다.

정치는 생명체라는 말이 있다. "미국 안 가면 어때"라고 했던 노무현을 통해 국민은 비록 현실은 다를지라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북한의 핵개발을 이해할 측면이 있다"고 했던 것 역시 나름의 용기로 보였다. 만약 정치적인 레토릭으로 이를 활용한 것이라면 최소한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야 했다. 미국 정부가 이런 발언에 대해 불편해 할 것을 몰랐거나 또는 현실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국내에서 강한 비판이 나올 줄 몰랐다면 자격미달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끝까지 감당할 의지나 힘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01년 9.11테러와 부시 정권의 등장 이후 미국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우선순위를 설정해 둔 상황이었다. 만약 김대중 정부가 이 시기를 운영했더라면 어땠을까? DJ의 장점은 북한 문제를 단순히 남북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일단 미국에 가서 '용인' 가능한 수준의 접근이 어디까지인가를 탐문했다. 일본, 러시아와 중국과 만나 청사진을 보여줬고 행여 있을지 모를 불안감을 다독였다. 노무현 정부는 이점에서 외교를 국내정치 하듯이 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독도는 우리 땅이다'고 선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무현은 여기까지 나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김대중 정부동안 다져왔던 일본과의 신뢰가 '독도독트린'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결코 넘지 않아야 할 선(線이)라는 게 있다.

한국은 미국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장 중국과 미국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두려움 때문에 미국을 택한다. 그 이유도 생각보다 간단하다. 중국은 자신에게 미칠 피해를 생각하면서 보복을 한다. 그러나 미국은 다르다. 만약 미국이 한국에 핵을 투하하더라도 자신에게 미칠 영향은 전혀 없다. 자신에게 닥칠 직접적인 위험이 없다면 인간은 누구나 무모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라크나 시리아에 위력을 측량할 수도 없는 폭탄을 투하하는 조종사는 그 위험을 직접 경험하기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라크 파병은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협력이라는 외양이 필요했고 영국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선뜻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는 제2의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공병대' 중심의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꼼수'는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유럽의 각국은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반전 여론을 핑계로 지혜롭게 넘겼다. 역사책을 다시 봐도 미국 역시 개별 국가의 입장을 온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미국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부분 역시 조금 다른 관점이 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미국과 IMF의 구조조정 계획을 120% 추진한 것은 한국 정부였다. 오히려 미국 정부는 너무 급격한 개혁을 말릴 정도였다. 지금 시점에서 봤을 때 "과연 이라크 파병으로 인해 노무현 정부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다. 부동산 정책 역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역린을 건드린 경우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부동산은 불패신화를 갖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한쪽에서는 엄청난 부당이득을 누리는 동안, 많은 국민은 솟구치는 집값을 충당하느라 허덕였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불로소득으로 볼 수 있는 임대료 차익에 대한 제대로 된 과세만 이루어졌어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월세며 전세로 얻은 수익금으로 날마다 축제를 벌이는데 자기 주변의 사람들은 서울에서 경기도로, 전세에서 월세로, 30평에서 20평으로 집을 줄여야 하는 것을 인내할 사람은 없다. "죽음과 세금은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을 제대로 공정하게 실천하면 되는 문제였다. 경제민주화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분배'와 관련한 정의를 실현하고 부당한 차별을 없애면 되는 일이었다. 공무원을 비롯한 기득권의 저항은 당연했지만 타협하지 않는 결기가 필요했던 영역이었다. 결국 국민 입장에서는 평소 잘 느끼지 못하는 평화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먹고 살 것'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덜 피곤하게 만드는 정치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눈앞에 둔 시점이다. 한번 촛불을 들어본 국민이 다시 들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과도한 기대감으로 정권을 잡은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마음이 무겁고 또 욕심이 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점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자본'은 휘발성이 강하다. 뭔가 손에 잡히는 변화가 하나라도 없다면 쉽게 소멸된다. 냉소와 분노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하는 질문이다. 한 가지 얘기를 사례로 들고 나서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어떻게 삶을 주도할 것인가』에 나온다.

임상심리학자인 브레즈니츠 박사는 이스라엘 군인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완전 군장을 하고 20KM를 행군하는 훈련병을 대상으로 한 연구였다. 그는 군인들을 모두 4개조로 나누었다. 1조의 경우, 미리 행군거리를 알려주고 5km마다 남은 거리를 알려줬다. 2조에게는 그냥 먼 거리를 행군하다고만 했다. 3조에게는 15km만 행군한다고 말한 후에 14km 지점에서 20km를 행군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마지막 4조에게는 출반 전에 25km를 행군한다고 말하고, 14km 지점에서 20km로 행군을 단축하다고 알렸다. 4개 조 중에서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았던 조는 당연히 1조였다. 자신의 목표 지점을 알고,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체력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다.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그룹은 행군 거리도, 자신의 위치도 몰랐던 2조였다. 나머지 그룹 중에서는 그래도 행군이 짧아졌다는 것에 위안을 받은 3조가 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미대선을 이끌어낸 대한민국의 국민은 더 이상 어리지 않다. 물론 모든 문제를 다 잘 알 수도 없고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무엇이 중한지 정도는 알 수 있고, 막연한 기대감만이 아니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잘 안다. 한국 민주주의 시작은 1987년 6.29선언 이후라고 하더라도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있다. 나이 서른이면 뜻을 세우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나이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벌써 몇 번 경험했고 그래도 아직은 꿈을 포기하는 나이도 아니다. 옳은 것이 있다면, 더 아름다운 길이 있다면, 더 사람다운 방식이 있으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인내할 줄 아는 나이다. 국민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인 신념이 출발점이다. 분명 국민은 풀 같은 존재로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국민 중 일부는 여전히 냉전이라는 감옥에 살고 있으며 이분들에게 다른 생각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럼에도, 긴 겨울 동안 주말을 반납하고, 기꺼이 촛불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이들보다 성숙한 존재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여론조사로만 존재하는 추상이 아니라 '서른 살에 접어든' 시민이다.

박근혜는 대선 토론에서 "대통령이 되면 보여 드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공약도 없었고 뭐든지 즉흥적이었다. 위의 실험에서 2조와 비슷한 경우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3조 정도에 해당한다.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위기를 그래도 조기에 졸업했다. 남북문제도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4조와 비슷했다. 무엇보다 본인이 조급했다. 자신이 한국 사회의 약자라는 마음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황된 희망은 좌절보다 더 나쁘다. 게다가, 당시는, 국민 다수도 준비가 되지 못했다. 성숙함이 부족했다. 그냥 대통령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대로 된 안보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모두가 불평을 시작했다. 왜 그 정도밖에 안되냐고 했고 여기에는 지식인과 언론도 한 몫을 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차기 정권을 잡는 사람은 1조의 경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약(公約)은 국민과 하는 엄숙한 약속이다. 공약(空約)이 되는 순간 신성한 '합의'가 깨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중하게 공약을 세워야 하고, 특히나, 현실성이 없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구조적 문제가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식의 '사탕발림'이 없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중장기 과제'로 분류하고, 당위로서 하고 싶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하겠다는 욕심도 버려야 한다. 냉정하게 봤을 때, 차기 정권은 그간의 역주행을 바로 잡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쾌속정이 아니라 항공모함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궤도 수정을 천천히 해야 하고,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합의를 최대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위의 1조에 했던 방식으로 목표치가 어디까지인지, 현재 어떤 상황인지, 국민으로서 어떤 책임과 권리가 있는지,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면 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야 한다. 언론을 잘 활용하는 것은 당연 중요하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운전을 할 때 우리는 '네비게이션'을 이용한다. 정치의 본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목적지를 제대로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네가티브의 유혹이 있더라도, 정책 제시에 집중해야 한다.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핵심 순위를 정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경제 민주화'가 강력한 후보다. 평화가 없이는 끝없는 이념 갈등이 불가피하다. 군사비를 줄이지 않고는 다른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 또한 경제민주화의 본질은 '분배' 정의다. 성장은 물론 중요하지만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면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돈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돈이 제대로 선순환되지 않는 사회다. 많은 내용이 경제 민주화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교육, 환경, 여성, 과학, 에너지 등 다른 영역은 우선순위에서 빠져도 된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하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집중할 수 있다. 그래야 정치적 자본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 '평화'에 반대할 수는 없다. 민주화에 반대하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다른 문제는 집권 중반기나 후반기에 또는 차기 정권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문제다. 방향을 제대로 알려준 다음에는 반드시 '지금 현재'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는 이 영역에서 실패했다. 주류 언론이 적대적으로 돌아서면서 '대안언론'이나 '청와대 채널'을 직접 활용하려고 했던 게 패착이었다. 본질은 '담론경쟁'이다. 일단, 서른 살의 성숙한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감과 동의'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정서적인 측면과 이성적인 측면 모두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겸손해야 하고, 무엇보다, 합리적인 설득과 정서적인 진정성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연히 이해관계가 적은 사람들을 적극 활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뜻을 함께 하는 '담론 후원세력'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홍보는 결국 '행동과 말'의 일치를 통해 관철된다는 말도 기억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소명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과 최대한 연대하고 이들이 직접 담론 경쟁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목적지를 알고 또 어디쯤 있는지를 알아도 모든 여행은 힘들기 마련이다. 국민을 위로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아무리 길고 지루해도 행복하다. 반대로, 편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거리와 상관없이 고단하다. 이 문제는 이성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음악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악을, 또 대화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말을 건네야 한다. 목적지도 알려주고 또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으니까 무조건 인내하고 따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교만한 운전자가 되는 길이다. 때로는 자신이 피곤하지 않아도 쉬어 갈 줄 알아야 하고, 오락거리도 찾아주고, 또 무엇보다 '지속 가능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청와대에 은거한 채 세상과 문을 닫고 산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통령을 비롯해 힘 있는 사람은 존재 그 자체가 정치다. 그들이 어디에 가고, 어떤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누구의 입이 되어주는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도 많다. 무엇보다 가슴이 따뜻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약자가 되어 본 사람, 약자와 함께 울어본 사람, 그리고 약자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들과 함께 행군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