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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전관들의 리퍼블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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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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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정운호 쪽 사람들이 서초동 골목을 몰려다녔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얘기다. 법조 비리 의혹의 주인공 정운호(51)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측근이 전관(前官) 변호사를 수소문하고 다닌 건 해외 원정도박 수사를 앞둔 2014년 가을이었다. "정 대표 사건을 정리해줄 변호사가 누구냐. 실탄(현금)은 얼마든지 있다." 한 거물급 브로커는 지인들에게 "정 대표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저렇게 설치고 다니면 반드시 뒤탈이 날 것'이라 판단해 거절했다"고 말했다.

수천억원대 자산가로 알려진 기업 오너의 형사사건이 터지자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브로커들이 모여들었다. 먼저 건설업자 이모(56)씨가 움직였다. 이씨는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를 정 대표에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정 대표 사건 항소심이 배당된 당일(지난해 12월 29일) 임모 부장판사와 식사하며 선처를 부탁했다.

정 대표와의 50억원 수임료 분쟁으로 의혹을 촉발시킨 부장판사 출신 최유정(46) 변호사가 브로커 이모(44)씨와 함께 사건에 손을 댄 건 그 뒤다. 상당수 변호사들은 "정 대표가 2억 정도만 썼다면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온갖 브로커, 변호사들이 달려들면서 이상 조짐을 감지한 판사들이 실형을 선고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의혹의 핵심은 브로커들일까. 답은 '아니오'다. 김한규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가장 큰 의혹은 판검사 출신 전관들이 수사와 재판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느냐다. 검찰이 브로커 몇 명 잡고 수사를 끝낸다면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 대표가 어떻게 두 차례나 무혐의 처리될 수 있었는지, 항소심 구형량은 왜 줄었는지, 정 대표 보석 신청에 검찰이 왜 '적의처리(適宜處理·적절히 처리)해 달라'고 했는지, 정 대표 측이 재판부 배당을 어떻게 알았는지, 법원 내부의 수상한 접촉은 더 없었는지 밝혀야 한다.

또 하나 정 대표 기소에서 빠진 게 있다. 외환관리법 위반이다. 해외에서 100억원 넘게 도박을 했다면 외환관리법 위반이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기소 내용에 들어가지도, 무혐의 처리되지도 않았다.

변호사업계에선 수사 단계에서 사건을 맡았던 검사장 출신 홍 변호사를 주목하고 있다. 한 변호사는 "당시 수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하면 결국 조직 내부에 칼을 대는 것"이라며 "만일 검찰이 제 식구 감싸기를 한다면 특검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현재 홍 변호사는 "수사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사실 정운호 사건은 예외적인 케이스다. 수임료가 수십억이 아니었다면, 정 대표와 최 변호사가 치고받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예외적인 사건이 바꾼다. 20억원이든, 2억원이든 전관(수사관) 출신 브로커들이 사건을 물어오면 전관(검사·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뽀찌(중개수수료)를 떼주고 사건을 맡는 구조는 다르지 않다.

이젠 '유전무죄(有錢無罪)'를 넘어 '유전유죄(有錢有罪)'라는 개탄까지 나온다. 검찰 출신 변호사들이 사건을 조사해 '공소장에 그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고소장을 작성해주는 고소 대리 사건이 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돈 없고 빽 없는 피해자들은 5년씩 기다려야 하지만 돈 있고 빽 있는 피해자는 언제든 유죄를 받아낼 수 있는 시대다.

가슴 아픈 건 일감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청년 변호사들이다. 열심히 공부해 로스쿨에 가고 변호사 자격증을 따도 전관들을 부러워하며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반면 일부 전관들은 변호인 선임서를 내지 않고 전화 한 통화로 '몰래 변론' '전화 변론'을 하면 수억원을 거머쥘 수 있다. 걸려도 과태료를 내면 그만이다.

형사사법이 돈과 전관들에 춤을 추는 한 시민들은 수사와 재판을 신뢰하기 어렵다. 법원과 검찰 수뇌부는 문 닫을 각오 하고 내부를 오염시키고 있는 외부의 전관들과 싸워야 한다. "법 앞에 평등" 원칙까지 '적의처리'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