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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절규와 어버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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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22일) 오후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야윈 얼굴의 안경 쓴 남자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 판매한 살인 기업을 살인죄로 구속 처벌해주세요!' 그가 입은 노란 조끼 뒷부분엔 '내 아내를 살려내라'는 글자가 굵게 새겨져 있었다.

안성우(39)씨. 2011년 2월 임신 7개월의 아내가 거실에서 쓰러졌다. 급성호흡부전 진단을 받은 아내는 병원에 입원한 지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올해 아홉 살이 된 아들의 폐는 딱딱하게 섬유화됐다. 200명 넘는 이가 숨졌지만 지난 5년간 기업들의 사과도, 보상도, 진상 규명도, 처벌도 없었다. 도보와 자전거로 전국을 돌며 외로운 항의를 계속해야 했다. 안씨는 "잊히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내가 이런다고 해결될까? 이렇게 잊히는 건 아닐까? 정부는 기업 대 개인의 소비자 분쟁으로 치부하고, 언론도 잠시 관심을 가졌다가 다른 사건들로 옮겨 가고...."

2002년 청부살인에 여동생을 잃은 하진영(39)씨. 그가 1인 시위를 시작한 건 지난 2월 어머니가 동생 곁으로 떠난 직후였다. 무기징역을 받고도 6년간 호화 병실에서 생활하다 재수감됐던 가해자 윤길자씨가 '시설 좋은 화성직업훈련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은 하씨 가족을 또 한 번 좌절의 늪에 밀어 넣었다.

법무부는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할 뿐 하씨 가족에게 설명 한마디 한 적이 없다. 하씨는 국민감사청구서에 시민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윤씨의 수형 생활 전반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해달라는 것이다.

"법의 단죄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피해자도 아픔을 딛고 설 수 있을 텐데.... 결국 저들의 권력과 돈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치고 힘들지만 끝까지 해볼 겁니다. 그들이 죽든가, 내가 죽든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과연 이들뿐일까. 정부와 검찰·경찰, 그리고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사이, 위로받는 자리에 있어야 할 피해자들이 비정한 거리로 나서고 있다. 피해자와 가족들에겐 죽을 만큼 몸부림치지 않으면 꿈쩍하지 않는 게 한국 땅이다. 황사 바람 맞으며 피켓을 들어야 하는 심정을 그 누가 이해한다 말할 수 있을까.

청와대와 전경련의 어버이연합 개입 의혹이 악성인 이유는 여론이 왜곡됐기 때문만이 아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피해자들의 절규를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막으려 한 것이다. 피해자들의 눈물에 가래침을 뱉은 것이다.

지난 1월 6일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이 "청와대 행정관과 협의했다"고 말한 그 집회가 열렸다. 그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참석한 수요집회 옆에선 '아베 신조! 책임 인정! 사과! 적극 환영!' '위안부소녀상 악용! 선동세력 각성하라!'는 느낌표들이 춤을 췄다. 세월호 반대 집회는 더 집요하게, 수십 차례 이어졌다. '유병언에겐 찍소리 못하는 세월호 유가족' '단원고 유가족이 벼슬이냐?'는 피켓이 등장했다. 유족들은 "나라가 이 모양인데..." "종북 X들"이란 막말을 들어야 했다.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언론 보도에 "마녀사냥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마녀사냥을 해온 것은 자신들이었다. 그들이 피해자들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을 유발시켰다면 정부와 경찰은 팔짱 끼고 방관했고, 피해자들이 지칠 때를 기다렸다. 언론은 공정성을 이유로 비중이 다른 두 목소리를 나란히 실었다.

가습기 살균제, 청부살인, 위안부, 세월호....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다. 피해자들이 조용히 기다리지 않는다고, 떼쓴다고, 나라 생각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고 타박하고 눈 흘기는 것. 피해자들이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그런 사회에서 재앙은 무한 반복될 뿐이다.

어버이연합의 배후에 전경련의 돈이 있고, 청와대의 힘이 있었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피해자들의 상처 위에 매카시의 망령을 불러들여 난장을 벌인 게 권력의 내부자들이라면 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청와대와 전경련에 말한다. 더 이상 침묵 뒤에 숨지 말라. 의혹의 가면을 벗고 진상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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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연합의 추선희 사무총장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의동 어버이연합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경련의 예산지원과 청와대 개입 등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사무실에 집회 개최 등 활동을 담은 사진 자료들이 벽면 가득 붙어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