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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도 고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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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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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갈 데까지 가자는 것인가. 대통령이자 피의자인 박근혜씨가 검찰 수사를 밟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난 4년간 검찰권이란 쿠폰을 그토록 알뜰하게 사용하던 그가 자기 손으로 임명한 검찰 간부들의 수사 결과를 "사상누각" "환상의 집"이라고 힐난했다. 지난주 차관 인사와 임명장 수여식이 공직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당신들 인사권은 내가 쥐고 있으니 다 나를 따르라.

 그의 양식에 기대를 걸었던 건 욕심이었다. 대통령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통령이 그래요'를 외쳐 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가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헌법에 나와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1조 2항),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다(7조 1항). 국민이 "물러나라"고 하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5000만 국민 중 집회에 나온 건 100만 명뿐이라고? 17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74%가 퇴진을 요구했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민의의 대변자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주권자의 명령이다. 봉사자인 대통령이 명령을 거역하고 주인에게 대드는 게 말이 되는가."(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군인이라면 명령 불복종으로 체포 대상이다. 그것 하나로 박 대통령은 정부와 국군을 통솔할 자격이 없다.

 "현재를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역사를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린 대통령에게 권한을 빌려 준 것이지 주권을 넘겨준 게 아닙니다."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열린 청소년 시국대회에서 역사학도를 꿈꾸는 한 여학생이 말했다. 나이 어린 학생도 아는 사실을 행정고시·사법시험에 합격한 공직자들이, 국민이 준 표로 국회에 간 의원들이 모르는 것인가.

 역사는 말한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한 과정에 장관들과 국회의 역할이 있었다. 4월 26일 아침 경무대에서 허정 외무부 장관과 김정열 국방부 장관이 이승만의 하야를 압박하고,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이승만-시민·학생 대표 면담을 중재한다. 이승만은 마지못해 '국민이 원한다면'이란 단서를 붙여 사임 성명을 발표한다. 그날 오후 여야는 ①대통령 즉시 하야 ②재선거 실시 ③내각책임제 개헌을 담은 국회 결의안을 통과시켜 이승만 퇴진을 기정사실화한다. '승리의 화요일'이다. 다음 날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참모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물러날 때를 알리는 것이다. 대통령 옆에도 눈과 귀가 있다면 직언을 해야 한다. 조원동·안종범·우병우·정호성.... 개인 이익과 심기 경호를 위한 사조직으로 변해 버린 청와대에서 공조직처럼 일한 이가 있었다.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다. 그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지시사항이 적힌 업무수첩과 국정원 세월호 보고문건으로 국민에 대한 마지막 의무를 다했다.

 해바라기도 고민을 한다. 나는 청와대 비서진, 정무직 공무원, 친박(親朴) 의원 가운데서도 고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자녀들의 물음에 더 머뭇거려선 안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생각하고 결단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부터 입장을 밝혀라. 검찰 수사가 옳은가, 그른가.

 "대통령님. 내려놓으십시오. 저는 더 이상 대통령 옆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봉사자가 아닙니다. 국민에 대한 봉사자입니다." 자신이 앉은 자리, 자신이 가진 것을 던져야 한다. 크든 작든 헌정 문란에 힘을 보탰던 과오를 국민 앞에 고해야 한다. 그런 양심의 외침이 울려 퍼질 때 공직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명예혁명이 가능해진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고, 어제의 인연들과 결별하는 건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주권자의 명령에 복무하기 위해, 공직자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민이 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노란 은행잎들이 구르는 거리에서 어린 눈망울들은 묻고 있다. 이제 누구 편에 설 겁니까. 국민입니까, 박근혜씨입니까.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