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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혈 쿠데타' 진실의 청문회를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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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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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디로 갑니까?" "청와대요!" "경찰과 싸우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나는 지난 토요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었다. 교복 입은 중고생 수백 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에 나섰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저희가 배운 민주주의는 어디 갔습니까' '아버지는 6월 항쟁, 딸은 시국선언'.

중고생들의 행진은 세종로 주차장 앞에서 경찰 차벽과 방패에 갇혔다. "길을 열어 주세요." "양심에 호소드립니다." 그 순간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이 신고한 행진은 끝났습니다. 계속 진출 시도 시에는 불법 집회가 됩니다. 채증 시작하고 사법처리하겠습니다."

아이들 옆에 서 있던 나는 부끄러웠다. 그 앳된 목소리들에 내민 게 겨우 채증과 사법처리라니. 이러고도 우린 아이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광화문광장 1부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됐다. 시민들이 든 촛불은 종로를 따라 도도히 흘러갔다.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 나란히 걸으며 "거짓 사과 필요 없다" "사과 말고 퇴진하라"를 외쳤다. 시민들 마음속에 대통령은 이미 궐위 상태였다. 그 뒤를 따르며 나는 며칠 전 조간신문 1면을 떠올렸다. '정부가 멈춰 섰다'.

정부가 멈춰 선 건 뉴스(news)가 아니다.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놀랄 만큼 잘 돌아간 데 있었다. 청와대 문건들이 무더기로 민간인 손에 넘어갔고, 재단 신청 하루 만에 인허가가 나왔고, 기업 돈 774억원이 순식간에 걷혔다. 세월호 사건 와중에 문체부 차관이 "대통령 오더"라며 승마계 비리 보도를 채근했고, 청와대 수석의 "VIP의 뜻" 한마디에 대기업 부회장이 해외로 쫓겨났다.

종로3가역에서 선도 트럭이 우회전해 을지로로 향했다. "박근혜가 몸통이다." "새누리도 공범이다." "기업들도 공범이다." 올 초부터 이어진 정운호→홍만표→진경준→우병우→최순실의 '나비효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해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검찰권력이 짝짓기하는 말기적 증상 속에서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시민들을 주권자의 자리에서 하야시킨 무혈(無血) 쿠데타가 가능했다. 그 물증이 미르·K스포츠재단이고, 최씨 딸 정유라의 대학 합격증이고, 우병우의 기고만장한 사진이다.

시민들의 함성은 한국 주류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박 대통령부터 안종범·우병우·정호성, 그리고 숨은 부역자들까지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수사로 전모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검 수사와 함께 국회에서 '진실의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의 헌정 파괴에 조금이라도 손을 보탰던 이들이 스스로 걸어 나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고백해야 한다.

진실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들이 진실을 말할 때 박수로 고무하고, 진실을 회피할 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징치하자. 그 과정을 통해 '이러려고 검사가 됐나'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나'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뼈아픈 자성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자성 위에서 우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명동·숭례문을 지나 다시 광화문광장에 섰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캠핑장을 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제 '아큐파이(점령하라) 광화문'이다. 더 늦기 전에 부끄러움을 자백하고, 서로의 부끄러움을 소환하라. 그러한 집단적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비로소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개혁의 연대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세월호 세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대가 열리기를 나는 소망한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