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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최순실 개헌'으로 기록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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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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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출근하는데 함께 집을 나서던 고3 딸이 물었다. "아빠, 승마복 어디서 구해요?" "승마복은 왜?" "친구들이 면접 붙으려면 승마복을 입어야 한대요." 대통령 측근이라는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 얘기였다. 아이들도 볼 건 다 보고 있구나. 이제 막 사회에 나가는 젊은이들이 출발부터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하는 것일까.

또다시 현기증이 인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보면서였다. "개헌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국가운영의 큰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당면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더욱 중요하고...." '최순실' 이름 석 자가 나오느냐가 관건이었던 시정연설에서 '개헌'이란 두 글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여섯 차례에 걸쳐 개헌을 부인해 왔다. 스스로 "블랙홀"이라 불렀던 개헌을 왜 갑자기 들고 나온 걸까. 그는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헌 주장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고 했다. 자신도 "참 나쁜 대통령이다. 대통령 눈에는 최순실밖에 안 보이느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봤을까.

개헌 논의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1987년 개헌 이후 5년 단임의 대통령 다섯 명이 모두 불화와 비판 속에 물러났다. 대통령 한 사람이 독점하는 권력 구조는 분명 문제가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직업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 속에 정치적 아노미 현상이 번지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와 미국의 트럼프 현상, 과반수 정당을 잉태하지 못하는 유럽이 그러하다. 사회 변화에 따른 기본권 조항 등의 재정비, 지방분권의 확립도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최순실씨와 미르·K스포츠 재단 문제로 코너에 몰리고 있었다. 개헌을 들고 나온 건 크고 작은 이슈들을 "블랙홀" 속에 밀어 넣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통령은 지난 20일 수석비서관회의와 어제 시정연설에서 최씨 의혹에 관해 "사과"라는 말도, "오해"라는 말도, "속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개헌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선 최소한의 전제 조건들이 있다. 가장 시급한 건 최순실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최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들을 실제 연설하기 전 미리 전달받은 정황이 나타났다. 청와대와 무관하다는 최씨가 이 파일들을 왜 사무실 PC에 갖고 있었던 것인가. 대통령과 최씨는 대체 무슨 관계이고,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란 최씨 말은 또 무슨 뜻인지 시민들은 알고 싶어 한다.

대통령은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서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했다. 키워드는 '자금 유용'이다. 수사 전문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 단어는 검찰 수사의 초점이 재단의 정체보다 재단 내 횡령에 맞춰질 것임을 예고한다. 결국 특검으로 갈 수밖에 없고, 특검으로 가야 한다. 대통령이 할 일은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개헌 논의에서 대통령은 뒤로 물러서야 한다.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김재원 정무수석)는 것은 그릇된 욕심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자는 것이라면 그 과정에서도 권한 분점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그간 숱한 사달들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을 무시한 데서 비롯된 것 아니었나. 국회·정부·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논의 기구를 만들어야 하고, '친박 고립'을 깨는 정계개편이 목적이 돼선 안 된다.

이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 개헌'에 이어 '최순실 개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물론 역사가 반드시 선한 의도, 순수한 동기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존심이란 것도 있다.

87년 헌법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숭고한 희생 위에 서 있다. 만약 '박근혜의, 박근혜에 의한, 최순실을 위한 헌법'이라면 나는 단 하루도 그 아래서 살고 싶지 않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