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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탐지기를 권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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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image/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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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비행을 해 왔는데 208초 사이의 일로 평가받게 됐다." 영화 '설리:허드슨강의 기적'은 실화를 다룬다. 베테랑 기장 설리는 2009년 1월 좌우 엔진이 고장 난 여객기를 뉴욕 허드슨강에 비상 착수(着水)시켜 탑승객 전원의 생명을 구한다. 인상적인 건 무사 귀환 후 사고의 전모를 조사받는 과정이다.

조사위원회는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설리를 가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조사한다.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공항으로 회항할 순 없었는지, 술을 언제 얼마나 마셨는지, 약물 경험이나 가족 문제는 없는지.... 각 분야 전문가가 참여하는 청문회에 가상 시뮬레이션까지 한다. 그렇게 샅샅이 뒤지고 털어서 한 점 의문 없이 원인과 책임을 규명해야만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집단사고를 보여준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의혹과 불신의 대상이 돼 있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어디 세월호뿐이랴.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은 대개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주장과 공방 속에 사라지곤 한다. 심지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5공(共)식 변명을 믿으라는 투다. 한국에서 '진실'은 누구 힘이 센지 겨루는 파워게임의 결과다.

보라.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숨진 농민 백남기씨의 사인은 "병사(病死)"다. 민정수석 아들이 서울경찰청 운전병으로 선발된 이유는 "코너링이 좋아서"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은 비선실세가 주도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것"이다. 권력의 내부자들 말고는 누가 승복할 수 있겠는가.

나는 차라리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권하고 싶다. 거짓말탐지기는 호흡과 혈압, 맥박, 피부 전기반응 등 신체의 미묘한 변화로 진실 여부를 가려내는 장치다. 양쪽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 특히 유용하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효율적인 수사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이 사무실 인턴을 중소기업진흥공단에 특혜 채용시켰다는 의혹을 검찰이 재수사하고 있잖아요. '재차 어렵다고 했지만 최 의원이 그냥 하라고 했다'는 당시 이사장의 법정 진술과 그런 적 없다는 최 의원의 주장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하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진실', 한 사람은 '거짓' 반응이 나올 테니...."

민정수석 처가의 강남 땅 매각 의혹도 믿어주지 않는다고 답답해할 필요가 없다. 진경준 전 검사장이 거래에 개입했는지를 놓고 상반된 진술을 하는 중개업자 두 명을 상대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벌이면 된다. 다만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조사한다는 전제는 지켜야 한다.

법원에선 거짓말탐지기 결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지만 검찰과 경찰은 "유죄판결과 90% 가까이 일치한다"고 말한다. 수사기법의 하나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엔 8506명이 경찰에서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받았다. '성폭행' 논란에 휩싸인 연예인들도 이 절차를 거쳤다.

'거짓말탐지기 앞에 평등'을 얘기하면서도 속이 상하는 건 기계장치에 의존해야 할 만큼 박근혜 정부의 진상규명 시스템이 후진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절차적 정의와 전문가들의 양심이다. 정권 실세에겐 소환조사를 서면으로 대체하거나 수사 도중에 "거래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코너링이 좋아" 뽑는 건 운전병만이 아닌 것일까.

의사·경찰·검사·기자.... 누구에게나 결정적 순간이 있다. 설리의 '208초'처럼 몇 시간의 행적, 몇 분 몇 초의 판단에 삶의 성패가 갈린다. 이 사건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책임을 회피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후배들이 설 자리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결국 한국은 한 걸음 더 '불신 지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허드슨강의 기적 반대편에 있는 세월호 사건에서 진정한 전문가는 잠수사들이었다. 잠수사 김관홍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사이비 전문가들의 무책임이었다. 그의 비극은 한국 사회가 거짓말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서 비롯됐다. 동영상 속의 김관홍은 스스로를 개탄한다. "아, 너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구나. 대한민국이라는 착각 속에서."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