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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좀 하든가, 잘 태어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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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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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다. 재학 중 합격, 법무부·대검찰청 근무, 금융조세조사부, 금융 관련 기관 파견.... '스폰서' 의혹, 주식 뇌물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준 부장검사와 진경준 전 검사장이 걸어온 길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검사 생활 대부분을 서울과 수도권에서 보낸 것까지도.

주목할 대목은 '기획통'으로 불린 두 검사가 법무부 근무 후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부로 갔다는 것이다. 이 부서는 대개 금융위원회 고발이나 의뢰를 받아 수사에 나선다. 검찰 용어로 '인지 부담'이 적다. 어렵지 않게 경력 관리를 할 수 있는 데다 대기업·로펌과 접촉할 기회도 많다. 맨땅에서 수사해야 하는 특수부, 일반 사건과 씨름하는 형사부와는 다른 점이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사위인 김 부장검사처럼 든든한 배경이 있거나 진 전 검사장처럼 일찍이 '진가'를 인정받은 검사들은 레드 카펫 위를 걷는다. 좋은 보직을 거치다 보니 그만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인적 네트워크도 넓힐 수 있다. 일선 검사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상위 1%의 검사들이다.

유엔 파견 근무(김형준)나 하버드 로스쿨 유학(진경준)까지 했으니 그 누구보다 국민을 위해 일했어야 했다. 둘은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았다. 기업인 친구, 사업가 친구를 스폰서로 두고 거침없이 자기 욕심을 채웠다. 막강 검찰권이 있는데 누가 감히 내 앞길을 막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들의 버킷 리스트엔 검찰총장·법무장관·국회의원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다수 검사들이 사각의 조사실에서 사회 정의를 위해 땀 흘리고 있다고 믿는다. 일선 검찰청의 형사부 검사들은 1인당 한 달에 적게는 100건, 많게는 200건 넘는 사건을 처리한다. 살인적인 업무량이다. 지난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홍영 검사는 새벽 2~3시까지 일하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야근 후 찌개 집에서 후배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검사도 많다. 검사들이 묵묵히, 일개미처럼 일하는 동안 소수의 특별한 검사는 고급 음식점·술집을 찾아다니며 분탕질을 쳤다. 이미 국민을 배신했던 그들에겐 친구의 배신을 탓할 자격이 없다. 선량한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죄까지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검찰이 진정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수사 전문가들 집단에서 악화(惡貨)가 걸러지지 않았다는 것,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조직의 룰이 돼 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사 적격 심사만 강화할 경우 잘나가는 검사들은 뒤로 빠지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검사들만 대상에 오르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결국 수사권·기소권을 한 손에 쥔 검찰의 힘을 분산하고, 법무부를 문민화하고,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한 줌도 안 되는 검사들의 전횡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원칙대로 일하는 것보다 윗분들 뜻에 맞게 잘하는 게 '유능함'이 돼 버린 건 비단 검찰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를 보라.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경찰 신분을 감추면 경찰청장 자리에 오를 수 있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대통령이 마음먹으면 장관에 임명된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성(性) 문제만 없으면 된다. 중요한 건 공직자의 도덕성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이다.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 '뭣이 중헌지' 모르는 대책, 공직사회의 도덕적 해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시대를 증언하는 고전이 된 영화 '내부자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러길래 잘 좀 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태어나든가." 부장검사가 무릎 꿇고 사정하는 검사에게 내뱉는 말이다. 지시 잘 받드는 기술자들이 우대받고, 부모·처가의 스펙이 출세의 디딤돌이 되는 세상을 빗댄 건 아닐까. 이 말기적 증상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게 두려울 뿐이다.

그래도 영화에서 상황을 반전시킨 계기는 검사의 내부고발이었다. "이렇게 계속 갈 순 없다"는 내부 양심들의 반성과 정의감 없이는 어떠한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전국의 검사들에게 묻고 싶다. 검사들은 가오(자존심)도 없습니까?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