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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샐러리맨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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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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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영정 앞에 국화를 놓았다. 이인원(69) 롯데그룹 부회장. 그는 검찰에 출두하기로 한 지난 금요일(26일) 아침 경기도 양평의 산책로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부검 결과 자살"이라고 했지만 우린 그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알지 못한다. '영육(靈肉)이 탈진했다'. 단서는 유서의 그 한 줄뿐이다.

토요일 밤 빈소엔 검은 정장, 검은 넥타이 차림의 임직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상주(喪主) 리본을 단 장례위원 대부분이 검찰 수사를 받는 피의자들이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이 부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숫자로 말한다'는 롯데의 경영 철학을 상징하는 분입니다. 신격호 총괄회장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실 때 '비가 많이 온다'고 말씀드리면 '몇 ㎜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내 보고서도 거의 표로 돼 있을 정도죠. 그렇게 치밀하고 정확한 총괄회장을 빼닮은 '리틀 신격호'가 이 부회장이었습니다."

이 부회장은 "2015년 초까지 총괄회장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비자금은 없다"고 유서에 적었다. 그는 왜 그 말을 검찰에 나가서 하지 못했을까. 차마 살아서는 "총괄회장의 결정"을 입에 올릴 수 없었던 것인가. 43년을 일하며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던 그 역시 죽음으로 묵비해야 하는 미생(未生)이었던 건가.

그의 죽음도 검찰 수사를 막을 수 없다. 기업이, 오너가 저지른 부정과 비리가 있다면 몸통을 밝혀야 하고, 응분의 처벌을 해야 한다. 다만 나는 그의 빈소에서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롯데그룹이 잘나가던 이명박 정부 때, 박근혜 정부 초기에라도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면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황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며 치매 시비에 휩싸인 고령(95세)의 신 총괄회장을 형사처벌하기 어렵게 됐다. 검찰로서는 신동빈 회장으로의 연결 고리가 필요했다. 그 고리로 지목된 이 부회장은 자신이 상황을 책임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의 수사 방식은 거칠었다. 지난 6월 10일 검사·수사관 240여 명을 투입해 신 총괄회장 거주지·사무실 등 17곳을 동시에 압수수색했다. 나흘 뒤 계열사 15곳을 추가 압수수색했다. 이 최대 규모의 압수수색 후 영장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논란이 이어졌다. 인권보호수사준칙의 '심야조사 금지'도 지켜지지 않았다. '조사받는 사람의 동의'를 얻어 새벽 2~3시까지 조사했다. 이 부회장 시신이 발견된 그날 아침에도 임원 한 명이 스무 시간 넘게 검찰청사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런 수사 분위기가 이 부회장의 영육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변호사의 말이다.

"3~4년 전부터 상당수 검사가 '변호사를 만나지 않았느냐' '거짓말을 짜맞추지 않았느냐'부터 묻습니다. 임원들 기 죽이는 거죠. 피의자의 방어권, 변호사 조력 받을 권리를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기업 사람들은 수사 끝나도 찍소리 한 번 못해요. 또 수사받게 될까 봐...."

재벌의 '오너 중심 먹이사슬'이 고착돼 사회적 공감에서 멀어지는 사이 기업은 만만한 수사 대상이 돼버렸고, 만만한 임원들이 그 치도곤을 맞고 있는 것 아닐까. 언론은 기업에 대한 감시자로 기능하지 않고, 압수수색의 총성이 울린 다음에야 '밴드왜건(Band wagon·악대 마차)'의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부회장의 자살은 한국 기업 문화와 한국 검찰, 언론의 총합인지 모른다. 지극히 한국적인 샐러리맨의 죽음인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회사인간의 비애는 계속될 것이다. 제도 개혁이 아닌 일회성 수사로는 이 왜곡된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세일즈맨의 아내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 그렇지만 그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까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