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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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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우 사태'의 본질은 우병우 민정수석이 버티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우 수석을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 이 정부 태동기인 2013년 1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박근혜 당선인은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총리 후보직 사퇴를 만류했다. 결국 김 위원장이 사퇴하자 박 당선인이 전화를 걸었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악성 루머까지 버텼는데 여기서 무너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틀 후 김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e메일을 보냈다. 언론이 제기한 의혹을 A4 용지 12장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당선인이 '인민재판식으로 근거 없는 의혹을 몰아붙이는 데 대해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이틀 연속 강조하더라."(2013년 2월 24일자 중앙SUNDAY, 김용준 위원장 인터뷰)

트라우마 때문일까. 박 대통령은 늘 비장하다. 밀려선 안 된다는 절박함이 앞선다. '아군 아니면 적군'의 대결 구도에서 정부 비판은 국기(國基) 흔들기가 된다. 우 수석의 의혹들과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내용 유출 논란 가운데 '무엇이 더 중허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특별감찰관의 본분을 저버린 중대한 위법 행위이고 묵과할 수 없는 사항으로...."

청와대가 이 특별감찰관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지난 금요일, 나는 '토요일 밤의 대학살(the Saturday Night Massacre)'을 떠올렸다. 토요일이었던 1973년 10월 20일 밤 백악관 대변인은 긴급 브리핑을 한다. "특별검사 해임, 법무장관 사임, 부장관 사임...."

내막은 이랬다.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닉슨 대통령의 대화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 제출을 요구한다. 닉슨은 그를 해임하기로 한다. 법무장관 엘리엇 리처드슨은 해임 지시에 따르지 않고 사직서를 낸다. 닉슨은 부장관 윌리엄 러클셔스에게 재차 지시하지만 그 역시 사임한다. 닉슨은 법무부 송무실장 로버트 보크를 통해 콕스 해임을 강행한다. 리처드슨은 닉슨에게 보내는 사직서에 깊은 유감을 나타낸다.

"저는 콕스를 임명하면서 의회에 '특별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뒤이어 특별검사로 임명된 레온 자워스키는 녹음 테이프 제출 명령을 법원에서 받아낸다. 닉슨 측의 항소에 연방대법원에서 전원일치 판결이 나온다.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 증거물을 제출하라." 보름 후 닉슨은 의회의 탄핵 압박 속에 사임을 발표한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정치의 흉터인 동시에 시스템의 힘을 확인한 계기였다. 궤도 이탈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려면 저마다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이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운명은 달라진다.

"우병우 죽이기의 본질은 식물정부를 만들겠다는 의도다."(연합뉴스 보도) 청와대 관계자들의 판단은 곧 대통령의 판단일 것이다. 민정수석 한 명의 거취에 정부의 동물성·식물성이 갈린다는 인식은 얼마나 취약한 정부인지, 얼마나 '검찰 정치'에 중독돼 있는지 보여준다.

특별감찰관과 특정 언론의 통화가 적절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불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청와대라는 국가 기구가 특별감찰관 한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것은 과잉 대응을 넘어 폭력에 가깝다. 차라리 "우병우 경질하고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겠다. 이석수도 수사받아야 한다"고 했어야 할 일 아닌가.

속수무책인 폭염 속에서 속수무책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주목해야 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다음 수순은 검찰 수사다. 검찰은 검찰대로, 법원은 법원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원칙에 따라 제 역할을 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지키는 길이다.

지금 이 사회의 책임자들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청와대 가이드라인을 따를 것인가. 리처드슨의 길을 걸을 것인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자리 욕심만 안 내면 된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선택들을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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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2일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우병우(오른쪽에서 세 번째) 민정수석도 자리에 배석해 앉아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