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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온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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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이 유통되는 것은 몇몇 음모자들 때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데 제때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거나 정부와 언론이 불신받을 때 괴담은 무섭게 번져나간다. 그 점에서 김정수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가 2011년 3월 한국정책학회보에 실은 논문 '감정의 재발견'은 주목할 만하다.

김 교수 논문은 존 그레이의 '화성남(男) 금성녀(女)' 모델을 정부-국민 관계에 대입한다. 목표지향적인 남성과 관계지향적인 여성 사이의 차이가 갈등을 키우듯 합리성과 과업 성취만 추구하는 정부와 '감정공동체'인 국민 간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교수가 '화성에서 온 정부, 금성에서 온 국민'이란 은유 틀을 적용한 건 2008년 광우병 파동이었다. 조급한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검역주권 포기'로 비치면서 국민 자존심이 크게 상한 상태에서 정부가 반대 여론을 정보 부족이나 괴담 유포자의 선동으로 일축하고 무시해 분노를 더 키우고 말았다는 결론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 주장의 과학적 진실성 여부가 아니라 정부가 국민의 불안과 분노라는 감정을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담화문은 국민들이 기대했던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라 사실상 일방적인 해명 이었다.

이러한 '화성 정부'식 접근은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에도 이어지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8일 사드 배치 발표 직전까지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수 주 내에 발표하겠다"던 배치 지역도 닷새 만에 경북 성주로 전격 발표했다. 정부가 여론 수렴 과정도, 주민 설명 절차도, 환경 영향 평가도 거치지 않고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우려가 커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사드 100m 밖은 전자파에서 안전하다."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하므로 화상을 입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5도 이상의 각도로 고출력의 전자파를 발사해 사람과 농작물에 피해를 줄 수 없다."
(국방부 '사드 관련 괴담에 대한 입장' 자료)

'사드 참외' '암·불임 유발' 같은 자극적인 괴담에 찬성할 생각은 없다. 결론부터 내려놓은 정부의 일방적 괴담 대응은 시민들의 정당한 불안감까지 범죄시하는 인상을 준다. 전자파 안전구역 등에 대한 의구심에 성실히 답하려는 자세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종의 맨스플레인(Man+explain)이다. '화가 났다니 미안하긴 한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한 오해로 시비 걸지 말고 국가 발전에 협조하라는 식'이라는 지적(김 교수 논문)은 사드 배치에도 유효하다.

현실은 논문을 넘어선다. '화성 정부'의 배경에 합리성 추구만 있는 게 아니다. 엘리트 공직자들의 공감능력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 세상을 '1% 대 99%'로 구분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자신과 처가(妻家)를 위해 칼잡이 노릇을 한 진경준 검사장을 보라. 나향욱·진경준 같은 이들이 과연 사드 배치에 불안해하는 성주 주민들, 대기업 갑질에 고통당하는 서민들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게 어떻게 내 일처럼 생각이 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나 전 기획관)이라고 하지 않을까.

청와대 민정수석도 다르지 않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를 검증하고 민심 동향을 파악해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자리다. 특수부 검사 출신인 우병우 수석은 특임검사팀이 수사 열흘 만에 구속할 수 있었던 진 검사장 혐의를 사전에 걸러내지 못했다. 인사검증 실패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넥슨이 처가 소유 부동산을 1326억원에 샀다'는 기사에만, 자기 일에만 흥분하면 되는가. 그가 지난해 메르스 사태와 사드 배치에 대한 여론 동향을 대통령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화성에서 온 정부'가 은유일 뿐이라면 정부가 싸워야 할 것은 괴담이 아니다. 공감 능력을 잃은 채 시민들의 정서와 유리된 정부 자신이다. 대통령이 해야 할 말은 "불필요한 논쟁을 멈추라"가 아니다. 왜 꼭 중요한 일이 터질 때면 대통령 모습은 보이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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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사드 배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