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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에 갇힌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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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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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에서 구조적인 문제로 노동자가 사망해도 망인의 과실, 혹은 책임자에게 벌금 몇백만원이 전부라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낸 곳이 바로 사법부다."

지난달 서울 구의역에서 김모(19)군이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뒤 서울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오영중 변호사가 쓴 '19세 청년의 죽음에 사법부는 자유로운가?'다(6월 13일 뉴스토마토). 오 변호사는 "사업주에게 사람의 생명과 안전은 비용에 불과하다. 법 위반을 통해 얻는 기대이익이 불이익보다 훨씬 크다면 법을 지킬 이유가 없어진다"고 했다.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노동의 문제를 말하고 싶다. 2013년 12월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한 전원합의체에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과거 소급분은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수의견의 논리는 세 단계다. '대부분의 노사가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합의해 왔다→이제 와서 추가 수당을 요구할 경우 기업이 중대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근로자가 합의 무효를 주장하며 추가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신의성실 원칙)에 어긋난다.'

이인복·이상훈·김신 대법관은 반대 의견에서 " 신의칙으로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성을 배척하는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고 했다.

민법이 노동사건에 다시 등장한 건 지난 2월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 2심을 깨고 "산업별노조 지회도 기업별 노조로 전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가 기업별 노조로 변경 결의를 한 발레오전장 노조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다. 다수의견이 민법의 '법인 아닌 사단' 이론을 끌어들인 데 대해 이인복·이상훈·김신·김소영·박상옥 대법관은 "노동조합법상 산업별 노조만이 조직형태 변경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김신 대법관은 "노동조합법은 간 데 없고, 헌법과 민법의 이론만 난무한다"고 개탄했다.

민법은 중요한 법이다. 문제는 민법이 개인들 간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과 노동자는 결코 대등하지 않다. 노동법이 존재하는 건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용자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판단하는 게 정의다. 민법 우위의 사고 밑에는 기업 우선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기업별 노조 전환' 판결이 있고 나서 한 달 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발레오만도지회 조합원들에 대한 회사의 징계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창조컨설팅이 작성한 문건들은 참가인(회사)이 발레오만도지회 조합원들의 탈퇴를 유도하고 조직 형태를 기업별 노조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을 내용으로...." 앞선 전원합의체 판결에 빠져 있던 실체, 회사와 창조컨설팅의 개입 정황을 지적한 것이다.

이들 노동사건은 대법원 구성이 왜 중요한지 보여준다. 그간 민사법과 판례에 정통한 순혈의 판사들이 대법관 자리를 예약해 왔다. 그러나 대법관은 판사들의 승진 코스에 그쳐선 안 된다. 대법원엔 소수자와 약자, 인권, 노동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비주류'들이 필요하다.

이용훈 대법원장 시대엔 진보 성향의 '독수리 5남매'(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가 한국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놓고 보수 대법관들과 논리 대결을 펼쳤다. '5'라는 숫자는 '7'이나 '8'에 밀리기 일쑤였지만 중도의 2~3명을 끌어들여 판례를 바꾸기도 했다. 8대 5 구도는 급격한 변화를 피하면서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지금은 '관료 사법' '국가 사법'으로 회귀하는 분위기다.

오는 9월 퇴임하는 이인복 대법관의 후임을 정해야 할 때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이제 출신의 다양성을 넘어 생각의 다양성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누구와 부딪치며 살았느냐, 어떤 가치를 붙들고 싸웠느냐다. 대법원이 달라져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나마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산업현장에서 아들 잃은 어머니, 아버지 잃은 아들딸의 눈물을 닦아줄 저스티스(대법관)를 고대한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