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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정의, 그 지독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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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하는 논설위원실엔 26세 청년이 알바를 하고 있다. 매일 오후 3시 출근해 9시까지 근무하는데, 그의 하루는 그것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30분까지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서 밤새워 일한다. 지방대를 중퇴한 그는 5000만원을 모아 장사를 하는 게 꿈이다. 그가 2~3년을 죽을 고생 해야 손에 쥘 수 있는 '꿈의 돈' 5000만원은 홍만표·최유정 변호사가 전화 한 통으로 받는 액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홍·최 변호사의 죄질이 나쁜 이유는 오피스텔·상가를 100채 넘게 갖고 있다거나 수임료 100억원을 벌어들인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 세금으로 검사·판사 월급 받으며 배우고 익힌 노하우를 유감없이 재활용했다. 검사장 출신 홍 변호사는 탈세를 위해 부동산 업체 운영에까지 손을 댔다. 신고하지 않은 수임료 등을 부동산에 집어넣고 그 임대수익을 수억원씩 챙겨왔다는 얘기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말한다. "사실상 돈세탁이다. 특수부 수사에서 알게 된 화이트칼라 범죄 수법이 그대로 적용됐다."

부장판사 출신 최 변호사도 재판하며 쌓은 기량을 200% 발휘했다. 그는 이숨투자자문 사건 주범을 변호하던 지난해 8월 금감원이 현장 조사를 나오자 반격을 가한다. 업무방해로 손해를 입었다며 금감원 직원들을 상대로 월급 가압류 결정을 받아낸 것이다. 기관은 강하지만 직원 개개인은 약하다는 점을 노렸다. 수임료 50억원은 취업·투자 사기 피해자 수천 명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홍·최 변호사는 현직에 있을 땐 국민과 정의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했고, 퇴직 후엔 '수사의 달인' '문학 판사'로 불리며 활동했다. 이제 그들의 양심을 보여주는 물증은 오피스텔 숫자와 대여금고다. 인터넷엔 "저런 자들이 수사하고 재판했다니..." "결국 법은 돈 많은 놈들 편이다"는 좌절과 불신이 번지고 있다.

대중의 직관은 무섭다. 한국의 특수 수사는 끊임없는 거래와 흥정의 과정이다. 저인망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자료들을 토대로 혐의 대여섯 개를 들이밀고, 입을 열면 두세 개를 빼주는 식이다. 그 메커니즘을 아는 전직 검찰 간부들은 거액의 '몰래 변론' '전화 변론'으로 딜(deal·거래)을 성사시켜 준다.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원정도박 사건에서도 검찰이 두 차례 무혐의 처리하고, 구형량을 깎고, 보석 신청에 '재판부가 알아서 해 달라'고 한 일련의 과정이 존재했다. "단서가 없어서" "관련자들이 입을 열지 않아서" 내부자들을 밝혀낼 수 없다는 건 시민들의 지능을 비웃는 짓이다. 홍 변호사가 검찰 출두 때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겠다"고 한 것도 딜이 불가피함을 알기 때문 아닌가. 검찰 수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이번에도 한 치 오차 없이 작동하고 있다.

최 변호사의 특설 링이었던 형사재판도 다르지 않다. 수사가 1심 재판을 대신하는 상황에서 판사들은 수사기록에 파묻혀 허우적거린다. 법정에 제출된 증거와 진술로 재판해야 한다는 공판중심주의 원칙이 후퇴하면서 진실은 공개된 재판에서 잘 가려지지 않는다. 당사자들로선 전직 판사 인맥을 돈으로 사는 게 합리적이다. 이 수사-재판의 먹이사슬을 깨뜨리지 않고는 달라질 것은 없다. '현역 전관(前官)'들이 법망을 피해갈 길목을 알려주고 '예비 전관'들이 독점적 권한을 오·남용하는 건 '전관예우'가 아니라 범죄다.

눈앞의 현실은 좋은 대학 나오고, 조금 더 배웠다는 자들이 법을 사유화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금 몇 만원이 없어 쩔쩔매고, 빚 수백만원 때문에 폐업해야 하는 서민들에게 "사법정의가 살아 있다"는 말은 지독한 농담일 뿐이다. 돈과 권력은 없어도 도덕적일 순 있지 않느냐고 자위하면 되는 일일까.

1789년 프랑스혁명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 시작됐다. 법복 귀족들의 가증스러운 위선만큼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찰 조사실과 법정에서 정의를 구할 수 없다면 거리에서 정의를 찾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이 슬프고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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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전관 로비 의혹에 연루된 홍만표 변호사가 27일 오전 소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