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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뭘 묻지 말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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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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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이나 '밥그릇 싸움' 같은 용어는 신중하게 사용돼야 한다. 표현이 거칠고 생경하다고 해서 모두 막말이라고 하면 그 상황과 맥락은 사라져버린다. 밥그릇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그 밥그릇을 놓고 싸운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가리지 않고 밥그릇 싸움으로 싸잡으면 편하긴 하지만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묻지마 범죄'란 말에서도 나태함이 느껴진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특정한 동기나 계획 없이 저지르는 범죄를 뜻할 터. 하지만 '묻지마'가 붙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별적 삶은 증발되고 사회적 맥락은 생략되기 일쑤다. 17일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사건은 과연 경찰 발표처럼 '묻지마 범죄'인 걸까.

지난 일요일(22일) 저녁 강남역 10번 출구. 출구 구조물에 수없이 많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출구 앞에서 마스크로 입을 가린 남녀 10여 명이 1인 시위 중이었다. '이곳은 추모를 위한 공간입니다. 성차별을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제 뒤에 계신 분들은 자신이 성별로 인해 살해당해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경찰이 쳐놓은 통행선 안쪽에선 수십 명씩 둘러서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가 아닙니다. 사건을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닙니까." "여성 혐오가 아니라고요? 그럼, 범인이 왜 남자 6명은 보내고 여성만 살해했습니까."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여기 경찰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라고 했잖아요. 흉기 앞에선 남녀 모두가 약자입니다." "범죄 통계를 보세요. 강력범죄 피해자 10명 중 9명이 여성이에요."

추모제는 30~40m 떨어진 은행 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건 추모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열등감을...." 한 청년이 화단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들은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 '조심해서 들어가' '들어가서 카톡해'라고 말합니다.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국가를 향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함께 외쳐 주십시오. 남자들은 기분 나쁘다고 하지만 여성들은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식 후 빈 교실에 들어갔다 화장실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 '성폭력 생존자'란 말을 듣고서야 살아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여기 계신 여성분들도 당당하게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한 여성은 "이번 사건을 놓고 '못생겼으니까 찔렀겠지' 이런 농담이 오간다. 언론도 피해자를 '화장실녀(女)'라고 하는데 우리가 무슨 장난감이냐"고 했다. 추모제는 남자 서넛이 "이게 무슨 추모냐"고 고함치며 행사장 진입을 시도하면서 잠시 중단됐다.

그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나는 여성 혐오를 보았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불안함을 호소하는 수천·수만 개의 포스트잇에서, 하루하루 성추행과 성희롱에 노출돼 있다는 여성들의 증언에서, 굳이 그곳까지 나와 조롱을 내뱉는 남성들의 모습에서. 여성 혐오는 여자를 싫어하거나 꺼리는 것만이 아니다. 여자라면 환장하고, 차별하고, 편견·멸시·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모두 여성 혐오다(김수아 서울대 교수 2015년 논문).

강남역 사건 피의자 김씨는 여성들이 "나를 공격하고 괴롭혔다" "담배꽁초를 던지고 나를 지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가 정신질환자라고, 그의 적대감이 막연하다고 '묻지마 범죄'로 불러야 할까. 백번 양보해도 여성이 언제, 어디서든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현실과 맥락은 변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시내버스 안에 화장품 냄새가 난다고 여성을 폭행하고, 성폭행 신고를 한 14세 소녀를 병원으로 찾아가 살해하고, 인터넷에서 여성을 '김치녀' '상폐녀(상장폐지녀)' '삼일한(여자는 삼일에 한 번 패야 한다)'으로 부르는 사회다.

정부 발표대로 화장실 개선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남녀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은 빼놓은 채 '묻지 마' 딱지를 붙이는 게 옳은가. 대체 뭘 묻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그것을 묻고 싶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